2008.11.14-16.쇠-해날. 더러 흐리고 바람 불고 / ‘빈들’ 모임


비가 다녀갈 거라 했습니다.
그러면 기온도 뚝 떨어질 테지요.
몇 뿌리라도 안에서 겨울을 나라고
바삐 연못에서 부레옥잠이랑 물상추를 가마솥방으로 들이고,
구석 먼지들도 좀 털고,
동네 할머니들과 올해 마늘은 언제 놓을려냐며 마늘종자도 사고,
아이랑 공부도 하고 교무실일도 하고,
김천으로 넘어가 실내수영장도 들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기락샘도 들어오고,
서울서 귀농을 꿈꾸는 미선님과 형환님도 그 편에 같이 왔지요.
대전에서 산골 겨울을 위한 선물꾸러미 하나가 맞아주었습니다.

꽃이 지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지네 눈물같이
겨울이 훑어 간 이곳
바람만이 남은 이곳에
꽃이 지네 꽃이 지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피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피네 눈물같이
봄이 다시 돌아온 이곳
그대 오지 않는 이곳에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산과 들 사이로

문대현의 곡 '꽃'을 부르며 고개를 드는 가을 끝자락입니다.
보름 아니어도 달빛으로 온 산마을이 훤합니다.
계신 곳도 여전하실 테지요.

이러저러 주말에 다녀가는 걸음이 잦은 이곳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름을 붙여보기도 하지요.
‘빈 들’모임!
추수를 끝낸 빈 들에서 만나는 겁니다.
쇠날 밤부터 해날 해 떨어질 때까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일도 하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시도 읽고 명상도 하고 수련도 하고
이야기도 넘치도록 하며 들이 채워지면
다시 비우고 채우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일정한 틀도 없고, 딱히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물꼬를 매개로 어우러지는 거지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주말이었더랬습니다.
정작 ‘빈들’ 모임을 준비하던 젊은 친구들은
급히 생긴 다른 일에 좇겨 다음을 기약했는데,
벌여놓은 판이라 이름을 버리지 않고 사흘을 보냈더랬지요.
쇠날 밤에 들어온 분들에다
흙날에는 국선도 수련을 하는 치룡님이랑
대전에서 민호님 영아님이 아이들 선용이랑 수용이랑 손을 보태러오고,
해날에는 용인에서 갓난쟁이 석현이가 태현이랑 지현이랑
엄마 윤정님, 아빠 정윤님, 고모 보윤님이랑 들어왔지요.
그리고 해날 오후엔 영동서 정선님이
겨울 방을 밝힐 화분을 초록불처럼 들고 오셨더랍니다.

아이들은 토란을 파고 남은 마지막 고춧잎을 땄으며
마당가에 쌓여있던 블록을 치웠습니다.
동생들을 돌보며 마을을 휘젓기도 하고
마당에서 리어카를 타며 놀기도 하였지요.
어른들은 본관 비닐을 치고
된장집과 고추장집, 곶감집을 치워내고
부엌 묵은 먼지를 털고
아이들과 우르르 올라 달골 감도 털었습니다.
이미 익어가고 있던 감은
곶감용으로는 글렀으나 좋은 먹을거리가 되었고
나머지는 감식초 항아리로 들어갔지요.
늦도록 달골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기도 하고
또 하룻밤은 햇발동에서 차를 마시며
살아갈 날을 더듬기도 하였습니다.
이른 아침엔 변함없이 명상을 하고 수련하는 이도 있었지요.

밥상도 푸졌습니다.
삭혀두었던 고추도 나왔고
오는 이들이 내놓은 반찬들도 그득했지요.
석현이네는 산골서 귀한 생선까지 챙겨왔고
그걸 또 정선님은 팔 걷고 다 다듬어
두고 잘 먹으라고 나누어 냉동실에 넣어도 주었습니다.
미선샘은 일을 어찌나 찾아서 잘하던지요.
큰 살림을 하던 단체에서 일을 해본 경험 덕이었겠습니다.
그렇게 이 살림을 같이 살아주어도 좋겠다 싶데요.
부엌 선반을 닦으며
시골살림인데도 (아마도 ‘생각보다’) 꽤 깔끔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곳으로 전수를 떠나거나 해봤던 일들로
눈이 후덕해서 그렇기도 하겠습디다.

차츰 흐려지던 하늘이
해날 오후에는 그예 눈이라도 올 듯 울음을 참은 듯 보였습니다.
흐린 오후를 우리는 은행을 구워 깨물으며 난롯가에 앉았더랬지요.
겨울밤의 화롯가처럼 말입니다.
형환샘은 왜 저리 인상을 찌푸리고 있나 했더니
몰려오는 나른함으로 졸음에 겨워
감기는 눈과 하는 씨름이라 해서 우리를 한 때 즐겁게 하였지요.
민호님은 점심 먹고 떠나라는 재촉에도
곶감집에 남아있던 뒷정리를 다 돕고 짐을 꾸렸습니다.
잘 먹고 간다셨지요.
“이렇게 다녀가는 이들 먹는 것도 만만찮겠어요.”
것도 그렇겠습니다.
하지만 이 산골서 겨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밥상 나눔 그게 다랍니다.
저녁 먹기 전 먼저 일어선 이들이 있었고,
석현이네는 어둠 깊어서야 아쉬움을 접고 떠났습니다.
정선님만 남아 주말 마지막 밤을 달골에서 묵기로 하였지요.

아, 하룻저녁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홀랜드 오퍼스 (Mr. Holland"s Opus, 1995).
인생의 보험이라고 생각하고 따놓았던 교사자격증으로
대박을 안겨줄 오케스트라 곡을 작곡하다 4년만 하려 교사가 된 홀랜드는
30년을 교단에서 보내게 됩니다.
재단의 긴축재정으로 학교를 떠나게 된 그를
강당의 음악과 웅성거림이 불러 세우지요.
“선생님,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선생님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님 덕에 저희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선생님의 교향곡입니다.
저희가 선생님 작품의 멜로디이며 음표입니다.
저희가 바로 선생님께서 작곡한 음악입니다.”
첫 교단에 섰던 때부터 30년이 흐를 때까지의 제자들이 마련한 환송회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 ‘American symphony’의 지휘봉을 잡습니다.
진부하지만 감동입니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간이 됩니다.
영화가 끝나면 홀랜드가 교장으로부터 받는 나침반이 스틸장면으로 남지요,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수자를 넘어
그들 생의 방향, 그러니까 나침반을 주는 거라는 교장의 말과 함께.
아무리 가르쳐다 안 된다는 아이를 놓고
체육교사가 홀랜드를 채찍질하는 장면의 대사는
영화를 또 봐도 역시 곱씹게 합니다.
“가르치는 게(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야.”
맞습니다,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지요.
어른들에겐 아이들 앞에 선 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그리고 아이들에겐 좋은 음악 선물이 되는 영화였지요,
좀 길긴 합니다만.

빈들을 채운 사람들이 떠났고,
다시 들은 비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날에 그 들은 또 채워질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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