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다!
비님 오시다!
어제도 왔고, 그제도 왔다.
가물었더랬다.
제한급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이 전남의 섬 지역만이 아니었으나
보길도 노화도 금일도 소안도 들이 주 한두 차례 물이 공급되었다 했다.
이번 비에 저수지 수위가 절반 이상 올라갔다고.
차차 제한급수가 해제될 거라는 소식.
“고맙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들을 해내는 시대라 해도 하늘이 할 일이 늘 있는!
이웃의 젊은 아낙이 전화를 넣었다.
비도 내리는데 혹 물꼬도 여유가 좀 있지 않겠냐고.
초대였다.
음악이 흘렀고,
지금 만들고 있는 인형의 몸통에 솜을 집어넣으며
같이 비를 보고 음악을 들었다.
안한자적(安閑自適; 평화롭고 한가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다)이라.
정극인의 상춘곡이 절로 나오다.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
녯사람 풍류를 미칠가 못 미칠가
천지간 남자 몸이 날만한 이 하건마는
산림에 뭇쳐 이셔 지락을 모를 것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앏픠 두고
송죽 울울리예 풍월주인 되어셔라”
하하, 딱 여기까지만 되더라.
그러다 그 끝도 기억해내나니.
“공명도 날 뀌우고 부귀도 날 뀌우니
청풍명월 외예 엇던 벗이 잇사고
단표누항에 흣튼 혜음 아니 하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찌하리”
무서워라, 긴 세월 건너서도 이리 입에 오르는 가사여!
단표누항(簞瓢陋巷)을 거기서 배웠다.
누추한 거리; 대광주리와 표주박과 소박한 거리; 도시락과 표주박과 소박한 거리; 소박한 생활
그리 살고 싶었다.
그리 산다.
멧골의 바쁜 가운데 잠깐 얻어낸 틈, 망중한(忙中閑)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