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4.불날. 흐림

조회 수 509 추천 수 0 2023.11.25 23:49:03


오후 내내 철망을 옮겼다.

달골 창고동 뒤란에는 건축 현장에서 쓰는 굵은 와이어메쉬가 잔뜩 쌓여있었다.

두어 해 전 준한샘이 실어다놓은 것이다.

아침뜨락 울타리로 써야지 했지만 일이 쉬 되지는 않고 있었고,

간간이 하나씩 끌어다 멧돼지나 고라니가 넘어오는 구멍들에 두었다.

그것도 세운 건 아니었고,

그런 게 있으면 드나들기 불편해서 덜 오겠거니 하고 던져두었던.

가끔씩 나타나는 그들의 흔적을 볼라치면

그래도 철망을 피해 다니는 듯 보여

적으나마 도움은 되나 보다 한.

어제 아침 멧돼지의 흔적은 처참하다 할 수준이었다.

햇발동 데크와 사이집 돌담까지 진출한 그들이었다.

바닥에 온통 아주 쟁기질을 해두었다.

발자국들을 따라 다녀보니 아침뜨락의 밥못 곁으로 산에서 수로를 타고 내려온 듯했고,

아래로는 산길을 타고 내려와 들깨밭 너머 경사지로 들어온 듯.

철망들을 가져다 이어 붙이듯 가장자리들에 던졌다.

땀에 흠뻑 젖었다.

 

원래 나쁜 인간? 글쎄. 상황이 있을 뿐이다.

작정하고 나쁜 인간이 얼마나 있을라고.

다들 각자가 가진 이유로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시골에서 경계를 맞대고 사이좋기 어렵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다남의 일이 아니었다.

달골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둔 유일한 이웃이 있는데,

경기도에 살면서 컨테이너 농막을 가져다 놓고 별장 삼아 드나드는 나이드신 분들이다.

달골에 그들이 먼저 들어섰기에

그간 뒤에 들어와 먼저 공간을 쓴 그네를 침해했다고 가끔 지청구를 듣고는 했다.

오늘 그예 다투다.

마침 철망을 나르고 있던 참이었는데,

내려오신 걸음에 바로 맞딱뜨려 아저씨가 날 불러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자주 그의 편에서는 우리가 나쁘고, 우리 편에서는 그네가 나쁘다.

지난 달 산청에서 업어온 꽃 하나 사라졌기 CCTV를 확인했더랬다.

달골 대문 들어서서 왼편의 무궁화 아래 팻말 앞에 심었더랬는데,

아침저녁 오가며 보는 자리였다.

이웃 아저씨가 들어와 자연스레 뽑아 던져버리는 거다.

영상을 확인하고 그 장면을 손전화로 찍어 문자로 보냈더랬다.

그런데 오늘 다짜고짜 와서 당신네 대추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주웠을 뿐이라고 우긴다.

겅중해서 자칫 풀로 보이기도 했을.

그래서 당신이 뽑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을 테지.

하지만 이 같은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대문의 벚나무가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네가 잘라놓고 시침 뚝 떼고 안 잘랐다 해서

벤 사람을 찾느라 한전 직원들 작업팀 네 팀을 샅샅이 뒤지고 하는 사이

답답한 한전 직원이 혹시나 하고 그네에게 전화했더니 실토했더라나.

그네 집으로 들어가는 전봇대 전선을 치려해서 미처 우리에게 말을 못하고 잘랐을 수 있다.

그렇게 된 상황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닌 걸

미안하게 되었다, 그런 사과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끝까지 외면이다.

우리 울 안으로 오랫동안 주차를 해서

어느 날 기표샘이 왔기 우리 불편을 말했더니

당장 그네를 찾아가서 대문 바깥쪽으로 해 달라 한 일도 있었다.

그네가 그랬던 건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게 이유였다,

오늘 나는 아주 작정하고 핏대 세웠다.

제발 좀 건드리지 마라, 그런 외침이었던.

그렇게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내가 상하는 일도 아니더라.

좋은 사람을 포기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더라.

지금? (마음괜찮다.

우리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어떤 현안마다 그리 살아가게 될 테지.

흘러가보자.

그동안 불편만 했는데,

정작 그리 들이받고 놨더니 외려 덜 불편해지는 이 마음은 무언가...

나는 저자거리에 살고, 이곳에서 살아내는 일이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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