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눈이 다녀갔다.
주말에 들어왔던 대처 식구들이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다, 눈 소식에.
달날 이른 아침 이곳에서 출근을 하기도 하는데.
계자 아이가 남겨놓고 간 신발을 빨았다.
(산오름을 다녀왔던 물꼬 신발들이야 이미 빨았고,
말려 벌써 숨꼬방 안 창고 쪽으로 들어갔다만.)
보내주려.
다시 올 때 챙기면 된다지만 아직 남은 겨울이라 없으면 아쉬우리.
일정 하나 잡고 있다.
겨울계자에서 아직 힘이 남았다. 밥바라지 정환샘이며 휘령샘이며 여러 샘들 덕이라.
시작은 그랬다. 한 엄마가 오랜 병상이라 아이들 돌보는 걸 며칠이라도 돕고 싶었던.
같이 겨울여행을 가도 좋으리.
때며 흐름이며 이리저리 궁리해본다.
곧 인도에 머물 때 들어가 있었으면 싶은 아쉬람이 하나 생각나
부랴부랴 메일을 보내다.
두 달 전에는 연락을 달라했는데, 지금이라도.
처음에는 달랑 내 필요한 말만 했다가,
아차, 적어도 내가 누군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주고 말해야지 싶어 다시 글월을 쓰다.
예의이기도 하겠다.
물꼬에 문의해오는 글월에 대해서도 그렇거든.
이왕이면 보내는 이의 정보가 좀 있는 게 좋다.
그것이 더 예의바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뭐나 하면 는다.
근래 여러 차례 영문메일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도 또 수월해지네, 하하.
그런데 나도 나를 믿을 수 없어,
최근엔 한글조차 너무 당연히 오래 잘 써 왔던 글자마저 맞춤법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하는지라,
더구나 잘 쓰지 않는 언어이고 보면 더욱 불안정한.
번역기로 맞는지 확인을 해보는 절차를 거치기도.
그러면 처음부터 번역기로 하면 되지 않냐고?
그건 또 그것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리.
조금씩 노화를 겪는 것에 한 지점씩 대처법을 생각하게 된다.
“보고 싶어요!”
주 88시간 병원에서 일하는 식구 하나라.
주말에는 먹을 걸 좀 해서 위문을 가기로 한다.
집 밖을 나오지 않고도 방까지 음식을 불러들일 수 있는 세상이나
그래도 집밥은 또 집밥.
무식한 울어머니 늘 그러셨댔지,
밖에서 먹는 건 상품이라고, 라면을 먹어도 집에서 먹어야 살이 된다고.
그건 밥에 깃든 영혼을 말함일. 사랑일.
부모는 밥을 하며 존재감을 느끼기도 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