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17.물날. 맑음

조회 수 1130 추천 수 0 2007.10.26 07:07:00

2007.10.17.물날. 맑음


일 시간에 아이들이 감을 땄습니다.
가을입니다.
상범샘은 아랫다랑이 논에 물고랑을 팠습니다.
아직 덜 빠진 물은 추수를 늦출 거니까요.
가을입니다.
기락샘은 장작을 팼습니다.
겨울을 날 단도리를 합니다.
가을입니다.
삼촌은 연일 달골에 올라 포도밭을 갈무리하는 중이지요.
“닭이 추워서 알을 덜 놓나...”
닭장에도 겨울 맞을 채비를 단단히 해줍니다.
가을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겨울준비 해주러 오라고 말을 넣습니다.
산골 겨울은 혹독하기 이를 데 없지요.
가을입니다.
이국으로 떠나-버-린 이도 그리운 이 시간이겠습니다.
감나무, 감나무 천지로 붉습니다.
가을입니다.

----------------------

< 감이 있는 풍경 >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게
그리 어려울 것도 아니었지만 쉬울 것 또한 아니었지요
상처투성이인 땅 떠나고 만다 할 때
지니고 온 것은 가족들 사진도 아니고
친구들과의 추억도 아니고
감나무가 있는 어느 가을날의 산사 엽서 한 장
굳이 챙긴 것도 아니고 수첩에 끼워져 있던
가을이 올 때마다는
이곳도 나뭇잎 물이 들고 겨울은 닥쳐서
이 맘 때면 꼭 그 가을이 복받쳐 오르는 거예요
잎 진 감나무에 아직 두런두런 매달린 주황색 감은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어찌나 선명하던지
해방구에 세워둔 붉은 깃발의 반가움 같을 때마저 있어요
비바람 지나던 봄 한참도 늦자락
후두둑 떨어져 내린 감꽃으로 목걸이 만드노라면
다 만들기도 전에 속절도 없이 멍이 들어 버렸댔지요
태풍 지나면 여물지도 못하고 떨어져 내리던 감을
소금물에 삭혀 먹어본 어린 날이
혹 당신에게도 있었을라나요
이른 가을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느새 익고 또 익어대던,
감을 따는 게 놀이였고,
감이 친구였던,
좋아하지만 수업시간 대답 한마디 못해보고
선생님 떠나실 적 선물이라고 들고 간 감 바구니
당신이 가끔 그 바구니의 탐스런 감 하나가 되어
가을 산사를 저만치 등에 지고
버리고 온 사진 속에서 이 먼 나라로
성큼 성큼 걸어 나옵니다
가을입니다
(2002.10)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1394 2020. 1.22.물날. 오후 짤끔거리다 저녁비 옥영경 2020-02-21 485
1393 2019. 9. 8.해날. 태풍 지났으나 비 옥영경 2019-10-23 485
1392 2월 어른의 학교 사흗날, 2022. 2.27.해날. 밤 눈싸라기 폴폴 옥영경 2022-03-24 484
1391 2020. 4.15.물날. 맑음 / 총선 옥영경 2020-06-15 484
1390 2019.11. 7.나무날. 오후 흐림 / 내가 내가 되는 용기! 옥영경 2019-12-29 484
1389 2019.11. 4.달날. 맑음 옥영경 2019-12-27 484
1388 2019. 9.30.달날. 맑음 / 어머니는 남는다 옥영경 2019-11-22 484
1387 2022. 1.24.달날. 흐림 옥영경 2022-01-31 483
1386 2020.10.10.흙날. 맑음 / 새 책 출간 계약서 옥영경 2020-11-18 483
1385 2019.11.20.물날. 맑음 / 서울 북토크: <내 삶은 내가 살게 네 삶은 네가 살아> 옥영경 2020-01-09 483
1384 173계자 이튿날, 2024. 1. 8.달날. 맑음 옥영경 2024-01-10 482
1383 2019.12.31.불날. 해 옥영경 2020-01-17 482
1382 2월 어른의 학교 여는 날, 2020. 2.21.쇠날. 밤비 옥영경 2020-03-28 480
1381 2019.10. 5.흙날. 흐림 옥영경 2019-11-24 479
1380 2024. 1. 6.흙날. 맑음 / 173계자 미리모임 옥영경 2024-01-08 478
1379 2021. 1.30.흙날. 해 옥영경 2021-02-14 478
1378 167계자 나흗날, 2021. 1.20.물날. 해 옥영경 2021-02-08 478
1377 2020. 2.25.불날. 비 옥영경 2020-03-31 478
1376 2020. 1.19.해날. 아침 이슬비 옥영경 2020-02-20 478
1375 2020. 1. 2.나무날. 조금 흐림 옥영경 2020-01-20 478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