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16.불날. 맑음

조회 수 1068 추천 수 0 2008.10.04 12:50:00

2008. 9.16.불날. 맑음


큰대문을 지나다 문득 문설주에 눈이 멎었습니다.
몇 개의 붉은 담쟁이덩굴 잎들이 거기 있었지요.
계절이 건너갈 때마다
언제나 ‘성큼’ ‘어느새’라는 말이 딸려갑니다.
산골 가을이 거기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진리는
곱씹어도 곱씹어도 새삼스럽습니다.
무거운 그대 가슴 속의 돌덩이도
지나간 것이 되는 날이 올 것이지요...

포도를 땄습니다.
마음이 싱숭생숭입니다.
딱 우리 먹을 만치 나왔습니다.
상품으로 내지 않고 우리 먹을 것만 한다는 말은
이웃에 좀 나누고 실컷 먹고,
그리고 효소 담고 포도주 담고 잼 만든다는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름을 지나며그럴 줄 모르지도 않았지만
(누가 그랬지요, 애처로워 따먹을 수가 없더라고, 송이가 너무 작아)
이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흉작 소리도 못할 정도였지요.
어느 순간부터는 밭에 풀도 못 잡았습니다.
맡고 있던 이가 어느 순간 손을 놔버렸더랬습니다.
그럴 때가 있지요,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는 때가.
그렇다고 그 일을 다른 이가 할 형편이 못되는
우리들의 요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하늘이 고맙지요,
사람이 고맙지요.
포도 잘 먹었습니다, 실컷 먹었습니다.
잼 조금, 포도주 조금, 효소 조금, 양을 그렇게 나누었습니다.
다만 이웃에게, 고마운 이들에게 나눌 게 없어 미안습니다.
겨울에 포도주잔이나 같이 기울여야겠습니다.

“저게 뭐야?”
큰대문 앞 소나무 가지에
뭔가 시커먼 것이 대롱거리고 있었습니다.
초코파이 상자를 담은 플라스틱봉투!
“아마도 네 선물인 것 같다.”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이던,
고개 너머 김천 큰 마트에 가면
달포에 한 번은 꼭 사오던 초코파이 한 상자.
“괜찮겠어?”
“야, 아무리 가난해도 그거 한 상자를 못 살까? 두 상자 사.”
“아니예요, 이거면 충분해.”
그런 초코파이.
그 얘기를 듣고 더러 사람들 찾아오는 손에는
초코파이 상자가 들려있고는 하였더랬습니다.
아이가 훌쩍 커버린 지금도 말입니다.
누군가 지나다 들린 모양입니다,
으레 식구들이 있겠다 하고.
식구들이 있어도 들에 가 있기 일쑤라
아무도 만나지 못했던가 봅니다.
어느 분이신가요?

여러 사람과 같이 프리젠테이션 하나를 할 일이 있는데,
다른 일들에 밀려 마음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누군들 바쁘지 않을라구요, 열심히 사람들을 부르고
이것저것 궁리를 합니다.
모이면 그런 사람 하나 있으면 편하지요.
고맙습니다.
젊은 친구가 기특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자극이 되는 거지요.
모둠활동은 그래서 하는 걸 겝니다,
서로의 상호작용 속에 배우고 익히는 것.
이럴 때도 사는 일이 고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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