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2.해날. 맑음/소설, 단식 나흘째

조회 수 1259 추천 수 0 2009.11.27 11:04:00

2009.11.22.해날. 맑음/소설, 단식 나흘째


입동 지나 첫눈 내린다고 소설(小雪)입니다.
하늘과 땅이 막히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며,
손돌이추위가 이맘 때 일지요.
김장도 이때 한다 하였습니다.
이 맘 때의 별미는 나박김치에 단팥죽이지요.
오후 새참으로 냅니다.
마침 얼려둔 인절미가 있었고 단팥이 있었네요.
물꼬의 곳간에는 없는 게 없다던 아이들이 보고팠습니다.

오후 곶감집에 올랐습니다.
학교 앞뒤로 한 채씩 농가를 쓰고 있었지요.
상주하는 식구가 여럿이었을 적
두루 나누어 쓰기도 하였고
한 때 기숙사처럼도 썼으며
여러 이웃들이 살다 가기도 했고
겨울 계자에서 남자 아이들이 두어 해 잘 쓰기도 했더랬지요.
올해를 끝으로 집을 돌려줍니다.
더 이상 쓰임이 없어서도 그러하고
마침 서울 살던 주인네가 은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합니다.
몇 가지를 실어왔지요.
아직 몇 차례 더 챙겨 와야 합니다.
최근 거의 비어있었던 그곳이지만
사람 살았던 흔적 끝은 늘 나오는 것이 많지요.

그렇지 않아도 나무토목을 쌓으며 잘 놀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엄마가 보려고 빌린 건축 관련 책들을
아이가 더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지요.
오늘 아이는
책상과 책상 사이 그 허공을 어떻게 건축물이 건너게 할까 고민하더니
그예 다리를 놓았고,
그리고 계단을 놓았습니다.
놀이와 배움이 그렇게 그를 둘러싸고 있지요.

존경은 그의 모든 것이 다이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면만으로도 가능하지요.
그가 나랑 극도의 생각 차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이면 되지요.
가끔 우리는 사람에게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최근 몇 해를 만나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존경하는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시지요.
당신의 모든 것을, 아니 사실은 참 많은 부분을
결코 동의하지 않거나 바람직하게 보고 있지 않은데도
당신은 제 존경의 대상이십니다.
오늘 일 때문에 서로 오고간 메일이 있었는데
그의 서명은 이렇게 되어있었습니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아...
당신이 천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잠깐의 순간이었더이다.
최근 서점에서 한창 팔려나가는 이의 글이 그랬던가요,
뭘 해도 그 바닥은 결국 사랑이더랍니다.
마음을 다 털어놓고 나니 알 수 있었다지요.
‘세상과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세상을 향한, 여러분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내 맘의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건, 사랑이었다.’
또한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요.
귀염성이 있지도 그렇다고 환경이 좋은 가정 출신도 아닌
고아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귀여움을 못 받았기에 행동에 문제가 생겼고,
특히 고아원에 간 뒤로 늘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원장은 이 아이를 잘 감시하다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현장을 잡아서 쫓아내고 싶었다.’ 합니다.
어느 날 어떤 아이가 와서 고자질하기를
그 아이가 외부 사람에게 보내는 쪽지를 봤다 했습니다.
그걸 담장 옆 나무 속에 감추는 걸 알았고,
외부인이 가져가기 전 그 쪽지를 가로채야 했지요.
거기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분이 누구든 사랑합니다.’
문득
‘사랑’보다 ‘생각’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살고 있지는 않냔 생각 듭디다.

아이가 영화 <트로이>를 재밌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대사가 지나갔지요.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다 죽거든.
늘 마지막 순간을 살지.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
이 순간은 다시는 안와.’
단식 나흘째,
여전히 식구들 밥을 하고
수행을 하고
그리고 겨울이 깊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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