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2.나무날. 야삼경 화풍이 분다 / 김장 첫날

조회 수 1275 추천 수 0 2010.12.22 01:11:00

2010.12. 2.나무날. 야삼경 화풍이 분다 / 김장 첫날


자정, 절여놓은 배추를 뒤집고 운동장을 건너는데,
아, 화풍이 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날이 어쩜 이다지 푹한 걸까요...

소사아저씨가 간장집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돼지기름으로 가마솥부터 닦으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김장을 하기로 하면 맨 먼저 챙기는 절차입니다.
달골에 머물고 있으니 자주 비우는 간장집이지요.
눈이라도 내려 달골을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김장 속도가 또 어찌 될지 모르는 데다
틈틈이 일하는 이들이 쉴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김장독들을 다시 닦고,
고무 물통이며 소쿠리들을 죄 끄집어냅니다.

이른 오후, 집안 어르신들이 닿았습니다.
배추가 거기 실려 왔지요.
파종이 늦기도 늦었지만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뿌리까지 송두리째 몇 포기씩 사라지기를 여러 날,
결국 김장에 쓰기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사람이랑 다른 존재랑 잘 나눠먹는 걸로 결론 지었더랬습니다.
고라니와 노루 짓이었답니다.
해서 남도의 어르신들께 부탁해놓았더랬지요.
진주에서부터 먼 길 온 배추를 먹을 올 겨울이랍니다.
(늘 궁금했더랬는데, 한라산연구소에 따르면 고라니가 노루와 구별되는 점은 노루보다 몸이 훨씬 작고, 콧등에 하얀 띠가 있으며, 귀가 얼굴에 비해 훨씬 크고 둥글다는 점을 들 수 있다데요. 또한 수컷은 뿔 대신 송곳니가 있으며 노루는 엉덩이 부위에 하얀 반점이 있으나 고라니는 없다 합니다.)

무만 해도 그랬습니다.
우리 무는 총각무용으로 쓸 정도 밖에 크지 않았던 터라
아예 나눠주실 것 생각하며 올해는 하다 외할머니가 키우셨더랬습니다.
나이 마흔까지 집에서, 학교 다닐 때고 이후이고
밥 한 술 마음 쓰이게 않았던 딸이랬는데,
별 수 없이 친정 그늘에 사는 자식 되고 말았다니까요.
“신경 쓸 거 뭐 있노.”
이왕 김장바라지 하기로 했는데,
게서 준비 다 하겠다며 일을 덜어주셨습니다.
마음 쓰이게 넘들 손 빌릴 것도 없다시며
식구들끼리 되는대로 하자고도 하셨지요.
그렇게 하야 바리바리 싸여 내려진 짐,
그게 어떻게 차에 다 실렸을려나요.
무 배추에, 시금치와 겨울초, 미나리, 당파, 마늘, 생강,
바닷가 나가 직접 사서 말리신 생선들,
양념에 넣을 다시국물로 쓰일 다시 멸치와
(한 박스나 되는 멸치를 언제 한 마리 한 마리 똥은 떼내셨는지요)
뒤포리와 북어대가리와 마른 새우와 다시마,
그리고 오실 때마다 해 오시는 가래떡과 떡볶이떡,
딸래미 좋아하는 식혜를 해 주시겠다 실어온 질금이며 찹쌀이며,
초고추장이랑 깍두기에 고울 고운 고춧가루,
벼 흉년에 도토리 풍년이라고 묵가루와
그것으로 묵도 두리함지박해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어째서 어쩜 묵 하나의 때깔도 저리 고울까요...
겨우내 아이들 끓여 멕이라
생강차는 또 언제 저리 저미셨답니까.
아, 때깔고운 깍두기도 담아오셨습니다.

배추를 다듬었지요.
배추를 어떻게 쪼개면 찌끄래기가 덜 남는지
다시 주의 깊게 일러주십니다.
산골의 겨울 해는 바쁘기도 하여 금새 해 꼴딱 넘어가고
그러면 기온도 뚝 떨어집니다.
손놀림들이 빨라지지요.
어둡기 전 서둘러 절이고들 들어왔네요.
아이가 늘 큰 몫 합니다.

참, 아침이었더랬는데요,
“엄마, 이거 갖구 가요!”
서둘러 나설 일이 있었습니다.
어째 식구들 밥상만 차려놓고
서서도 밥 먹을 짬을 내지 못했지요.
그런데 막 출발하려는 차 앞으로 아이가 좇아왔습니다.
도시락입니다.
지난 4년 동안 가끔 있었던 풍경이지요.
빵을 구워 잼을 바르고 그 사이에
얼마 전 기락샘이 보내준 아보카도를 썰어 넣었습니다.
재밌습니다.
초등 6학년 나이의 아이는 산골에서 학교도 가지 않고
정작 학교에 아이를 보낼 에미가 공부를 하러갑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미 도시락을 싸서 보냅니다...
공부는 그렇게 자기 생의 흐름대로 하는 걸 겝니다.
곧 그 긴 긴 일정도 끝이 납니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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