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1242m 민주지산 오르다

조회 수 1464 추천 수 0 2004.07.27 21:32:00
자주 하는 산오름입니다만
곰을 잡으러 떠나거나 멧돼지를 잡자 오르거나 했지
산을 산이라고 오르기로는 처음입니다.
그것도 창대비 내리는 산이라니요.
게다가 1242m 험한 산이라니요.
세 해 전이었나요,
특전사 대원 몇이 눈 속에 갇혀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그 산입니다.

10시에 학교를 떠나 물한계곡 황룡사 앞에 이르러
10시 30분부터 산을 오르는기 시작하는데
기다렸던 비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일곱 살부터 5년까지의 아이 열 하나에
젊은 할아버지와 제가 함께 합니다.
창대비 속에 전의를 잃어버릴까 걱정돼
빗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자고
본격적으로 산오름이 시작이지 싶은 곳에서
돌무데기 곁에 모두 섰더랍니다.
왜 우리는 산을 오르는가,
물꼬에서 왜 이런 시간을 가지려 하는가,
위험 앞에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려 하는가,
산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누가 보면 평양에 파견되는 실미도 대원의 마지막 인사쯤으로 보였을라나요.
그 때 두 남자가 곁을 지나며
이 빗속에 무슨 일인가 기웃거립니다.
130여명이 관광버스 세 대로 와서
단 두 사람만 산을 오르기로 했다네요.
그 둘도 민주지산 쪽은 포기하고
가파르기가 좀 더 수월한 석기봉으로 꺾는다는데
(우리는 능선으로 이들을 만났더랍니다.
그 아저씨들의 놀란 표정이라니...)
정말 물길을 헤치고 가시밭길 돌무덤을 지나
아, 마침내 거기 민주지산을 만났더라지요.
그런데 세상에나,
그 곳이 사방팔방에서 가장 높은 곳임을 증명할 수가 없었더랍니다.
안개 때문에.
"바람이 세니까 밀어내 줄지도 몰라, 산이 그렇거든."
아니나 다를까 바람이 안개를 밀어내더니...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겠지요.
그런데 다음패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
다시 안개 천지,
이젠 앞 패가 설명을 합니다.
기다려 보라고, 바람이 세니 안개를 갈라줄 거라고.
다시 펼쳐지는 아랫녘, 이어지는 환호성,
다시 안개가 덮고 마지막패가 오고 다시 펼쳐지는 저 아래입니다.
"정말 이 기쁨 때문에 산에 오나봐요!"
우리는 새처럼 팔을 퍼덕이며 소리 소리 질렀답니다.
"고만 내려가자."
잠시 망설였지요,
이 비에 우리는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까,
기어이 무주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그런데 큰 비는 산길을 뎅겅 잡아먹었네요.
길인 줄 알고 따라간 곳이 저 아래 낭떠러지,
세 차례나 잠깐만, 소리치고 멈추며 아래를 살피고 또 살펴 내려갔는데,
아무래도 더는 갈 수 없는 길이겠다 싶더이다.
"도저히 안되겠어, 다시 돌아가야겠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 특히 빗속에서 이미 4시간을 강행군한 아이들이라면
"아이!"
영락없이 그리 짜증을 냈겠지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 반응이라니요.
"돌아가쟤."
그리고 다시 오릅니다.
다리가 불편한 정근이조차, 이럴 때 툴툴거릴 수 밖에 없는 그조차,
잠시 앉아서 쉬고는 다시 오릅니다.
"혼자 한 번 해볼게요."
밀어줄까 끌어줄까 물으니 제가 더 수월치 싶은 길을 찾아 오릅니다.
눈물 핑 돌데요.
무엇이 이 아이들을 그리 만들고 있는 건지...
그런 순간, 제 안에서 한 사람이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거대한 우주에 깔린 절대적인 힘앞에 기도를 하지요.
아이들은 결국 처음 한 단 한 가지 그 약속을 지켜냈습니다.
단 한 사람도(맨 뒤 한 녀석이 의심이 안가는 게 아니지만) 짜증내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보자 했던.

함께 하는 거친 길은 그런 거데요.
한 덩어리로 만들어주는 거요.
툭하면 불거지는 류옥하다와 채규의 다툼,
그런데 늘 먼저 가려고 누구하고라도 싸움을 하고 마는 채규가
류옥하다가 두꺼비 보는 참에 선두 자리에 섰던 틈을 타 먼저 오르다가
돌아서며 그러데요.
"먼저 갈래?"
비켜주는 겁니다.
두 차례나 목격한 미담이라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는 무주 설천 대불리 쪽으로 7시간 산오름을 마쳤더이다.
목을 축이고 입가심도 좀하고
단군을 모신 신불사에서 대사님의 삼십여분 강의까지 듣고
우리 실으러 넘어온 봉고차를 만났지요.
그제야 아픈 무릎이 생각나며 다리가 후덜거렸더이다.
피로가 언제였냐 싶게
아이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수한 노래를 잇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눈가가 빨개지데요.

설천 읍내에서 밥 사 먹었습니다.
"애들 먹을 게 없어서..."
애들 먹거리가 따로 있다니요,
다시 한 번 건강한 우리 공동체의 밥상을 생각했답니다.
"요새 아토피 때문에 아이들 그런 데로 보내려는 사람도 많다"더라지요.
된장찌개 김치찌개에 푸성귀 반찬들을 잘도 먹는 먹성은
딱히 배고픔이 까닭인 건 아니었지요.
나가보면 우리 삶의 긍정성을 만나고 또 만난다지요.

밤 10시, 영동역에 들러 새끼일꾼 고등학교 형아들 일곱을 받아
우르르 들어오니 11시,
성학이 보내는 잔치로 머쉬멜로우 구워 크래커에 싸먹자던 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아이들은
씻고 자정이 다 돼서야 잠이 들었네요.
우리들의 영웅담을 못내 더 수다떨지 못해
아쉽고 또 아쉬운 밤이었다지요.
자-랑-스럽다는 말,
이럴 때 쓰라고 준비해준 말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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