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물날. 맑음

조회 수 668 추천 수 0 2015.11.23 15:27:47


한밤중 밭에 들어가

실한 파와 알이 찬 배추와 상추들을

그리고 가지와 토마토를 거두어 왔다.

이웃이 챙겨준 것들이었다.

덕분에 올 가을은 김치를 자주 담가먹는다.


내일 개봉하기로 한 세월호 참사 뒤의 1년을 다룬 <나쁜 나라>는 일정을 미뤘다.

생존학생 가족들의 요구로 재편집을 하던 중이었는데,

미수습자 가족들로부터도 비슷한 요구를 받고 다시 재편집에 들어갔다고.

<내릴 수 없는 배>(우석훈/웅진지식하우스, 2014)를 뒤늦게 읽었다.

4월 16일 아침은 까뮈의 <페스트>가 시작됐던 바로 그 날 아침이기도 했다!

세월호에 탔느냐 타지 않았느냐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이미 세월호,

여전히 내릴 수 없는 배이다.

동아시아의 여객선 시장에서 1차 시장이었던 한국은 왜 2차 시장이 되었는가,

나라가 부유해지면 점차 1차 시장이 되는데 왜 한국은 반대인가,

그래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배에 타지 않거나, 죽기 전에 내리거나.

학생들이 제주도로 간 것이 아니라 각 지역 교육청 등 교육 당국을 통해 보내지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 사회의 가장 약자에 해당하는 고등학생들,

그들을 특정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목표에 맞춰 투입시켰다,

누군가는 그 배를 타야 했으니.

자신들이 지켜야할 학생들을 내 아이처럼 아이들이라 부르며

실상은 그들 부모의 돈을 노리는 산업을 만들고, 정책을 만들고, 배를 운용하고.

경제성이 떨어지는 민간 기업의 경영 문제를 풀어주고자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규모여행을 보내는 식으로 정부가 개입하는 나라,

정부가 세금으로 책임지는 방식도 아닌,

국민 개인의 호주머니 털어서 민간 기업 이익을 챙겨주는 나라.

책임자를 찾겠다는 정부는 자신들이 손만 뻗으면 되는 곳에,

이 불안한 배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수학여행을 가라고 내몬 이들이 있음에도

국가는 바위 뒤에 숨고 그동안 모든 걸 동원해서 선주의 일가족만 죽어라고 추적했고,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내린 선장의 도덕성만을 문제 삼으며 인성교육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단계적 공영화 방식도 있고 민간과 공공이 경쟁하며 공존하는 방식도 있을 텐데

방법이 있지만 안 한다, 이 나라는.

지난 해이던가 나오미 클라인의 두 권의 책을 기웃거렸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3년 이라크전, 9.11테러와 뉴올리언스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람들이 엄청난 재앙에 놀라고 당황할 때 다국적 기업이나 통치 세력들은

자신들이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을 더욱 강력하게 전개한다. 일명 재난자본주의.(<쇼크 독트린>)

이런 재앙들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를 의심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시민사회가 재구성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출발점을 만든다고,

이타주의라는 인간본성과 연대의식을 경험하게 된다고.(<폐허를 응시하라>)

그런데, 정말 그러했는가...

‘잊지 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어디나 나부끼고 있던 현수막이었다.

그들을 기리며 슬퍼하겠다? 잊지 않고 분노하겠다? 도대체 뭘 잊지 않겠다던 말인가.

잊지 않는다는 건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이었을 것.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는가, 잊지 않고는 있는가?

세월호 이후 한국의 배들은 안전해졌는가?

이 국면을 핑계로 이뤄지는 더 큰 재난을 불러오는 행태들에 맞서고 있는가?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애달픈 영혼들을 잊지 않고 있기는 한가.

그 희생자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을 했는가? 기억했느냐고!

세월호에서 내릴 마음도 없고, 구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엘리트들이 이끄는 나라에서 우리는 여전히 산다.

많은 일에 경제적 차별이 발생하지만

합의하거나 논의하지 않아도 적어도 죽음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될 것을

그런 것조차 안 되는 나라에 우리 산다.

“교육도 실패했고 국가도 실패했고 부모도 실패했다.”

하지만, 기대컨대, 모든 일에 끝이 있겠지. 세월호도 종료되는 날이 오길.

누군가는 열심히 묻으려하지만 묻지 않으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씨름이길.

세월호... 기다리라 했고, 기다렸고, 그리고 죽었다.

나는 아직도 이 분노와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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