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수행을 끝낸 뒤
아침뜨樂 옴자의 패놓았던 땅을 고르고 유채 씨를 뿌렸다.
낼 들어올 이들 있어 맞이 겸 공사 뒷정리 겸 햇발동 재벌청소도 했다.
정히 안 되면 손님들 오셨을 때 더하지 하고 대략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남도에서 보내온, 음식이 든 택배상자도 마구잡이로 풀어 냉장고에 던지다시피 하고
기차역으로 향했네.
인천행.
바삐 끊은 서울행 표여서 입석(4호 차량 입석이 지하철처럼 벽으로 긴 의자가 생겼더라)이었는데,
어떤 분이 옆자리가 비자 당신 가방을 올려놓고 자리를 맡은 뒤
굳이 멀리 서 있는 내게 오라 부르셨네.
물꼬 같은 일 하고 산다 대접이라도 받는 양 마음 퍽 좋았던.
간밤 늦게 들어온 문자를 아침에 열었더랬다.
품앗이 혜경샘의 아버님 별세 소식이었다.
기표샘이며들 같이 빈소 들리기로 한 것.
“네다섯 시간은 걸리는데, 하루에 왕복 운전을?”
“내일 물꼬 일정이 있으니...”
너무 힘들지 않겠냐며 저 집에서 자고 가라는 기표샘.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루 몇 차례 없는 황간발 서울행이 마침 시간대가 맞춤했다.
영등포역에서 기표샘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름만에 또 불려나온 그였다.
“잠은 다른 댁에서 자기로 하였는데, 그래도 서울 온 걸음에 그대 사는 걸 봐야겠으이.”
그렇게 여의도도 들렀더랬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열 살 아이는 서른 청년이 되어
제 삶을 실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산골 노인네 고단하다고 인천까지 택시를 태워준 그였더라.
‘한 세상 애 많이 쓰셨습니다. 편히 가시옵소서.’
돌아가신 분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가장 큰 선물은
사람들을 불러모아준다는 것일 듯.
오랜만에 혜경샘을 보아 좋았다. 고마웠다.
물꼬의 여러 샘들도 보아 좋았다. 고마울 일이다.
대해리-황간-영등포역-여의도-인천 성모병원 장례식장-부평역-그리고 역곡.
긴 걸음이었다.
여기는 역곡의 물꼬 인연 댁.
마침 내일 물꼬로 들어갈 분이 거기 계셨던 거라.
그 차편에 내려가려지.
돌아가신 분이 먼 길 올 사람을 위해 그리 예비해주기라도 하신 걸까.
떠날 때까지 산 사람을 살피는 아버지들이라.
그리고 뭔가 불편함이 껴 물꼬에 한참 걸음이 멀었던 품앗이샘 하나에게
두 통의 문자를 보냈네;
그대에게.
가끔 그대 안전을 확인하려고 이러저러 알아보고는 했더란다.
안전하면 되었다. 고맙다.
그대를 많이 기대고 살았던 물꼬이기에 그대 없는 물꼬는 겨울이다, 모질고 긴.
오래 앓으며 더욱 그러했다.
혹 이곳으로 발걸음 닿지 못하는 까닭이 내 잘못과 모자람에 있다면
그건 내 잘못이지 그대 일은 결코 아님. 용서될 수 있다면 고마우리.
그저 그대를 기다리며 산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일(만남!)이었으면 하며,
연락 없는 마음이 부디 미움은 아니기를 바라며.
그 립 다!
상대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때에 이르러 본다, 나는 오직 기다린다,
그저 물꼬를 지키고 있는다, 언제든 그가 찾을 때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도록,
그래서 또 열심히 산다. 그쯤의 생각을 하며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