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4주 위탁교육이 끝나는 날.

11학년 아이와 천천히 아침을 먹고, 아침뜨락을 걸었다.

바람방에서 썼던 이불들을 세탁기 앞으로 내려놓고.

낮 11시 학생의 엄마가 왔고, 차를 냈다.

여기 살림을 눈여겨보신 당신은

다식용으로 쓸 과자류를 잔뜩 실어오셨더랬네.


아이 짐에 죽비를 같이 보냈다.

정신을 챙겨야겠다 싶을 때 이곳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손바닥을 내리쳐보라 했지.

그렇게 또 새로 시작하라고.

우리 집 아이 어릴 적 그를 기대고 산 세월이 길다.

낡고 너르고 오래된 멧골살림을, 특히 겨울날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음은

그를 기댔음에 크다.

11학년 아이랑 지내며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렸네.

이 한 달은 마치 그때처럼 깊이 우정을 나눈 시간.

든든했고, 고마웠다.

일상을 단단하게 보낸 시간이, 단단하게 먹은 끼니가

그의 앞날에도 힘을 발휘하리.


오후에 감을 좀 더 땄다.

마저 깎고 본관 중앙현관에 걸었다.

한 쪽 처마만큼은 걸어야 보기로나 먹기로나 낫지 않겠나.

아이들이 몇 개씩은 먹을 게 있어야지.

교무실 일들을 좀 챙기고 이른 저녁밥상을 차렸다.

아직 짐을 비우고 못하고 햇발동 거실에서 하룻밤을 더 머물기로 한다.

한 사람이 머물러도 열 사람이 머물러도 방문객은 방문객이라.

사람이 있으며 있는대로 좋은 이곳이나

또 없으면 없는 그 고즈넉함으로도 좋은 멧골이다.

 

날마다 글을 쓰고 날마다 사진을 찍고

날마다 문자로 보내오는 어른 계시는데,

그걸 날마다는 고사하고 사나흘을, 혹은 아주 긴 날이 지나서야 읽거나

심지어 읽지 못하는 날도 있다.

마지막으로 온, 그러니까 엊그제 쇠날에, 주중 닷새 출근해서 보내주시는 것이니,

글을 열었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한참을 혼자 웃었더라.

그리고 가슴 찡해지는데,

울 어머니(‘무식한 울 어머니라고 늘 말하는)를 생각했고,

그리고 이제 아들에게 나이 들어가는 어미가 되는 나를 생각했더라니.

내용인즉,

당신 진찰실로 할머니 한 분이 배가 아파 들어오시다 울리는 손전화를 받으시더라지.

원장님이 찬 거 먹지 말고 죽 먹고 약 잘 먹고 그리고 영양제도 좀 맞으란다며 전화를 끊어시고는

원장님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으시며

영양제라도 맞는다고 그래야 딸년이 용돈이라도 더 준다셨다지.

진찰도 안한 할머니의 처방이 기막히다’,라고 쓰셨다.

입원한 할머니의 아들로부터 원장님께 들어온 전화 이야기도 더하셨다.

자신의 어머니가 수술해야 하는 거냐고 묻더라지.

회진 때 그 할머니한테, 아드님께 수술해야 한다 그랬냐 하니

아니. 그래야 입원비라도 아들이 많이 줄깨비 할아부지가 그랜내벼’ 하시더란다.

속창아리까지 자식에게 다 빼어주고

부대자루처럼 골다공증 푸석한 몸띵이만 남은 할머님들.

이제 어린애가 되어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어려서 부모님께 하던 대로 하고 계신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부모에게

사인비 코사인비도 타내 용돈을 보태야 했던 가난한 시절의 학생들을 생각했다.

코끝 시린, 지나간 시절의 아름다움이라 말해도 좋을.

우리들의 어머니 안녕하신지,

우리는 안녕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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