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엊그제 봄날 같은 아침이었다.
오늘 서리가 눈처럼 멧골을 덮었다.
여느 날 같은 아침수행이었다.
중등 임용고시 1차 시험이 있었다.
물꼬의 인연들도 여럿 시험장에 들어갔다.
아는 체 못했다, 부담이지 싶어. 다만 수행하며 기도했다.
수능도 머잖았다.
특히 한 아이 얼굴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기도했다.
저녁수행으로 또한 다른 날 같은 걷기였다.
학교에는 은행이 많다.
밟힌 은행알 냄새가 학교를 흔들고, 종일 따라다닌다.
커다란 한 자루 쯤 씻고 말려 겨울에 잘 쓴다.
찾아온 이들과, 식구들끼리도, 아이들과 둘러앉아서도
낮이고 밤이고 구워먹는.
오늘은 수확한 호두와 은행 꾸러미를 물꼬의 큰 어르신 두 분께 보냈다.
지난주 만들어왔던 도자기 풍경을 꺼내 물고기 한 마리를 마저 색칠하고 엮었다.
오랜 학부모가 보내준 재봉틀도 작동을 확인했다.
1851년부터 있었던 Singer는 아직도 세계 1위 소리를 들을까.
100년도 전에 Singer 사가 만든 초기 재봉틀이 지금도 문제없이 굴러간다지.
망가지지를 않아서 새 제품이 팔리지 않았다던가.
윗실 끼우고, 작동해보고. 힘이 좋더라.
습이들 산책도 시키다. 제습이는 마을 주차장까지 진출하고, 가습이는 학교 뒤 댓마로.
설치미술에 대한 표절 논란이 있었다.꽃으로 탱크를 덮은, 2020 어린이시간예술축제 강원키즈트리엔날레 출품작 최정화의 ‘그린 커넥션’이
이용백 자신의 2012년 작품 ‘플라워 탱크’를 표절했다는.
지난 10월 문제제기가 있었고,
오늘 또 기사가 올랐더라.
사진으로 두 작품을 보았더랬다.
두 작품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전
나는 대번에 꽃을 쏘아 올리는 대포를 만들었던 티쭈를 떠올렸다.
1991년 민음사에서 나왔던 모리스 드리용의 <초록색 엄지소년 티쭈>.
아이들에게 서울 곳곳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1990년대에
그 책을 수업에서 느낌글을 쓰는 필독서로 활용했더랬다.
‘그린 커넥션’은 현충원에 헌화한 꽃을 수거해서 만들었다는데,
최정화는 오랫동안 값싼 꽃으로 작업을 해왔다.
꽃과 탱크!
사실 그것은 퍽 보편적인 연상물이다.
그것은 평화를 말하는 세계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러니까 그 이미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나만 해도 그것들을 보며 탱크의 총구에 꽃을 꽂은 티쭈를 떠올렸지 않나.
아름다운 들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예쁜 꽃을 즐기는 그림으로 시작하는,
글자가 한 자도 나오지 않는 니콜라이 포포프의 <왜?>(1999, 현암사)는
전쟁이 어떻게 시작하고 무엇을 남기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그림책이었다.
그때의 꽃은 사소한 출발이라는 의미도 있겠고, 평화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굳이 이런저런 예라고 들먹이는 건 그만큼 보편성을 담고 있다는 말이고
그런 의미에서 표절이라 보기 어렵지 않느냐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 논란을 둘러싼 여러 진영, 혹은 여론이 몰아가는
‘표절’에 대한 의견에서 보이는 폭력이 걱정스러웠다.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 몰아붙이는 공분, 그리고 남는 상처, 책임지지 않는 기사들,
이것 또한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문화 한 자락이라는 생각에 말이 길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