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30.흙날. 해

조회 수 482 추천 수 0 2021.02.14 23:26:31


 

다시 어제 쓴 눈 위로 눈 날린 새벽.

하지만 볕이 좋아 곧 녹았다.

달골에 올려져 있던 차도 내릴 수 있었다.

대처 식구들이 들어와 제습이와 가습이를 데리고 마을 산책을 시켰다.

 

계자가 지나간 살림들이 수습이 좀 되자 여유가 생겼네.

늘 신고 다니는 장화 두 켤레를 씻어

바랜 그림을 고쳤다.

이런 일이란 게 시간이 그리 걸리는 것도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손을 잡는 게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많은 일이 그러하다.

정작 거기 쓰이는 시간이 힘이 큰 게 아니다.

역시 마음을 내는 일이 필요한 거라.

그림 또한 제대로 꽃 하나 그려넣는 것도 아닌

그저 여러 가지 색을 흘리고 흩뿌리는 거라 더더욱 공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던.

1차로 해두고 말리는 중.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다룬 글 하나를 읽는다.

일리아스 책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일리아스에 대해 말한.

이야기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사들이 죽어가는 대목에서

시인은 전사들을 호명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누구의 아들이었는가 같은 그의 이력을.

그것에 대해 해석하기를, 시인은 그 누구도 엑스트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죽은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라고.

그런 거였겠구나, 내가 계자를 기록하는 것도,

함께 땀 흘린 품앗이샘과 새끼일꾼들을 기록해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바로 그런 경의였겠구나 싶었네.

나는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행적을, 그들을 기록해주고 싶었다.

, 그게 일리아스였겠구나...

밥노동이 왜 때로 귀히 대접받지 못하는가.

같은 시간 공부를 하면 학위라도 남지.

밥은 아무리 해도 먹고 치워버리니까.

그나마 자식에게 준 거라면 그 밥 먹고 자랐다고나 하지.

그게 아니라면 남는 게 없어 그 가치가 떨어지기 쉬운 일이라 누구나 하려들지 않는.

계자에 애쓴 이들이 손발과 마음이 그런 밥노동 같아서야 쓰겠는가.

(당연히 이 말은 밥노동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밥노동이 받는 대우에 대한 것임)

그들의 애씀을 기록할 의무가 내게 있으리니.

언젠가 꼭 이들을 기록하고 엮으리!

개봉박두라고 해두자, 우리들의 계자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는 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1414 2023. 8.23.물날. 작달비 / 면회 옥영경 2023-08-26 507
1413 2023. 8.21.달날. 오후, 걷힌 하늘 / 그대에게 옥영경 2023-08-22 507
1412 2019.12.17.불날. 비 / 밥바라지, 오란 말인지 오지 말란 말인지 옥영경 2020-01-16 507
1411 2019.11. 6.물날. 오후 흐림 옥영경 2019-12-28 507
1410 2023. 9. 3.해날. 맑음 옥영경 2023-09-14 506
1409 2022. 1.25.불날. 가랑비 옥영경 2022-01-31 506
1408 2020. 3. 5.나무날. 맑음 옥영경 2020-04-08 506
1407 2020. 4. 2.나무날. 맑음 옥영경 2020-05-27 505
1406 2019.11. 3.해날. 맑음 옥영경 2019-12-27 505
1405 2023.10.16.달날. 살짝 흐린 옥영경 2023-10-24 504
1404 2023 여름, 172계자(8.6~11) 갈무리글 옥영경 2023-08-14 504
1403 2019.11.12.불날. 맑음 옥영경 2019-12-31 504
1402 2019.10.28.달날. 맑음 / 우리 아이가 잘 먹지 않아요 옥영경 2019-12-16 504
1401 2023.11.17.쇠날. 첫눈 옥영경 2023-11-25 503
1400 2021. 1.29.쇠날. 맑음, 그리고 밤눈 옥영경 2021-02-13 503
1399 2023. 8.22.불날. 비 소식 있었으나 / 그대에게 옥영경 2023-08-26 502
1398 2022. 5. 6.쇠날. 맑음 / 동학농민 무장기포지와 ‘책마을 해리’ 옥영경 2022-06-14 502
1397 2022. 1.22.흙날. 흐리다 한 방울 비 지난 저녁 / 페미니즘을 말하는 책 두 권 옥영경 2022-01-30 502
1396 2020. 1. 6.달날. 비 옥영경 2020-01-20 501
1395 2022. 6.20. 달날. 먹구름 한 덩이 옥영경 2022-07-09 500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