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다는 날이었으나 맑았다. 고마워라.

도시에서 나날의 삶을 살아내느라 힘에 겨웠던 청년들이 자는 밤,

식구들이 모인 빈들이니 천천히 시작해도 되려니 한 아침.

아침뜨락의 제습이 밥을 주고 산책을 하고

그제야 사람들을 깨웠다.

너무 더디면 이 멧골 좋은 아침 기운을 놓칠세라 지나치게 더디지는 않게.

아침뜨락을 걷고 다시 느티나무 동그라미에 둘러섰는데,

가을빛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고,

바람이 건드린 풍경소리가 건너오고,

우리는 감나무 매달린 채 익은 감을 따먹었다.

가을이다!

 

학교로 내려와 수행방에서 해건지기.

몸을 풀고, 대배를 하고, 호흡명상을 하고.

올해 시험을 보는 대로 또 보지 않는 대로 기로에 선 열아홉 살들을 위해,

우리의 인연들을 위해,

그리고 새로 올 아이를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아침.

 

너나없이 좋아한다는 물꼬의 콩나물국밥을 먹고,

열 살 우리 수범이가 천상의 맛이라고까지 했던,

아침뜨락에 들어 일수행을 했다.

아가미길을 따라 늘어선 측백 아래의 잔돌을 주웠다.

예초기를 돌리자면 늘 걸림돌,

그래서 줍고 또 줍지만 어느새 흙을 비집고 올라온 것들.

큰 돌들도 이참에 다 걷어내다.

나나 맞이 돌탑을 쌓으면 좋겠네!”

어른 넷이 모아온 돌을 두 개의 돌탑의자 곁에 쌓기 시작했다.

곧 세상으로 올 새 생명을 안은 진주샘과

아빠 규명샘과 이모 휘령샘과 젊은할아버지 영철샘과 이 외할미가 그리 맞이잔치를 하였나니.

한 아이를 세상으로 맞기 위해 어른들이 한 정성이

한 생명에게 다 향하리.

즐거웠고 고마웠다.

 

낮밥으로 떡을 쪄먹고 오후엔 모과청을 담갔다.

씻고 닦고 쪼개고 썰고.

규명샘의 칼질이 큰 몫했다.

가는 걸음에 다 싸서 보내자 했는데,

양이 제법 많아 계자에 쓰일 것도 남길 수 있었네.

우리는 그렇게 가을을 담고 포장했더라.

 

저녁은 단호박죽을 전채로 시작해서 호박국에다 떡볶이며 풍성도 한 밥상.

실타래가 이어졌다.

유투버인 규명샘이 어머니 영정사진 대신 영상을 찍은 과정도 듣다.

세상으로 보자면 내세울 것 없는 한 어머니의 삶에 대한 기록은

청년의 증언으로 위대하게 되었나니.

곧 아비가 되는 이가 기록한 선대의 유산이라.

밤참으로 군고구마와 쿠키와 조금의 곡주를 놓고

실타래()단법석이 이어졌다.

노래가 없어도 노래였고,

춤이 없어도 춤이었던.

 

, 그러니까 방금, 놀라운 일을 만났다.

햇발동에 사람들을 들이고 사이집으로 건너오는 길,

건너 산 하늘 위에서 큰 별똥별 하나 내리는데,

내 생에 그렇게 환하고 굵고 천천히 내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소원을 빌기도 전에 그만 떨어져버리는 그런 별똥별이 아닌.

이것도 한 생명을 맞는 일에 일조하는 일이라 여겨졌다.

나나야, 어서 오렴!”

그리고 물꼬에도 길조로 느껴진.

모다 고마운 하루가 간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sort
594 6월 15일, 야생 사슴과 우렁각시 옥영경 2004-06-19 1456
593 손가락 풀기를 기다린 까닭 옥영경 2004-07-11 1456
592 1월 26일 물날 맑음, 101 계자 셋째 날 옥영경 2005-01-28 1457
591 2006.2.14.불날 / 2005학년도에 있었던 일련의 갈등에 대해서 옥영경 2006-02-15 1458
590 2006.2.27.달날 / 잡지 '민들레'를 읽고 옥영경 2006-02-28 1458
589 2006. 9. 7.나무날. 맑음 / 가을학기를 여는 산오름 옥영경 2006-09-18 1459
588 116 계자 나흗날, 2007. 1.10.물날. 검은 구름 가끔 지나고 옥영경 2007-01-15 1459
587 물꼬에서 쓰는 동화 옥영경 2004-05-08 1460
586 계자 96 세쨋날, 8월 4일 물날 옥영경 2004-08-08 1460
585 2007. 5.13.해날. 맑음 옥영경 2007-05-31 1460
584 11월 26일 쇠날 눈비, 덕유산 향적봉 1614m 옥영경 2004-12-02 1461
583 2007.12. 9.해날. 맑음 옥영경 2007-12-27 1461
582 8월 28-9일, 젊은 할아버지와 류옥하다 옥영경 2004-09-14 1462
581 2007.11.23.쇠날. 구름 오가다 옥영경 2007-12-01 1462
580 126 계자 닷샛날, 2008. 8. 7.나무날. 맑음 옥영경 2008-08-24 1462
579 7월 13일, 방충망 요새에서 옥영경 2004-07-20 1463
578 5월 11일 물날 비갰다 한밤에 다시 쏟아지다 옥영경 2005-05-16 1463
577 2005.12.8.나무날.맑음 / 섣달 잔치에 달뜨다 옥영경 2005-12-09 1463
576 2007. 9.23-24.해-달날. 비 내린 다음날 개다 옥영경 2007-10-05 1463
575 145 계자 닷샛날, 2011. 8. 4. 나무날. 흐린 하늘, 그리고 비 / 우리는 왜 산으로 갔는가 옥영경 2011-08-17 1463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