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을 지나온 한 남성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말미를 보다가
‘선택’을 생각했다.
‘우리의 시작이 우리를 정의하더라도
매일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없던 기회를 내게 주었다.
어떤 미래가 날 기다리든 그건 가족 모두의 유산이다.’(‘Hillbilly Elegy’ 가운데서)
모든 날들이 그렇다.
어쩔 수 없이 한 결정조차 선택이었다.
나는 오늘 어떤 선택 앞에 있었나,
그 결과는 무엇일까...
오늘 좀 얼얼했다. 두 방을 크게 맞았다.
공동기금을 만들어 집단 작업을 하고 그것으로 그 수만큼 결과물을 나누는 여성 집단에 있었다.
구성원들이 끼리끼리 이미 서로 아는 이들도 있었지만
내 경우는 지리적으로도 멀고 관계로도 독립적이었다.
사람들이 오지 않은 한 사람을 말하고 있었다.
하루를 왔고, 더 이상 오지 않기로 한 이었다.
“돈 만원을 가지고 말이야...”
그가 활동한 하루치의 재료비를 따져 입금을 해 달라 연락을 했는데
아직 입금을 하지 않았다 한다.
이유가 있겠지. 사실 우리는 아무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 않은 그의 행동에 대해.
그걸 가지고 뭐 그리 오래 곱씹고들 있던지.
공적인 모임도 아니었으므로 그것에 대해 구성원들이 조금 넉넉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타인을 향한 무차별 화살이 계속 날아갔다.
내 안에서는 우리의 빈약한 화젯거리가 싫은 마음도 일어났다.
무섭기까지 했다.
혹시 예전에 말에 치인 상처가 내게서 되살아나기라도 했거나
그 대상이 얼마든지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공포감 같은 게 들어버린.
또 하나의 방망이는,
작업을 같이 하던 이가 밥벌이로 하는 일의 달라진 출근 시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우리 작업을 하는 끝에야 작업실로 겨우 올 수 있다는.
문제는 그 결과물을 그가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같이 작업 하지 않았으니 결과물을 나눌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재료비도 낸 그였다.
사실 우리가 대단한 노동을 하고 얻는 결과물도 아니었다.
아, 물론 시간을 좀 들이기는 하네.
뭐 이리 사람의 마음이 강퍅한가 싶어서 속상하고 화나고 싫고,
이 역시 무섭기까지 했다.
그보다 더 나를 아프게 한 건
나는 내 생각을 말하지 못했다는 거다.
이미 그들과 뭔가 이질적인데 그 골을 더 패게 하고 싶지 않았던.
아, 그때 왜 나는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나.
절대 다수의 생각이 한 쪽으로 기운 상황이기도 했고(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아마도 더 큰 불의라면 싸웠을 듯한데, 그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도 그랬을 거라 변명한다.
한참을 내 안의 그 마음이 무엇인가 낱말을 찾지 못했다. 그건 비겁함이었다.
그저 조용히 마지막 활동 날까지 있다 나의 나라로(물론 물꼬이지. 깊은 멧골) 돌아오는 것.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의 한국 상황, 뭔가 기이하기까지 한 현 상황,
뭔가 시대가 거꾸로 가는 것만 같은, 극우화 되어가는 상황에서(자실 전세계적 상황이기도 한 듯)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마음은 아닐까.
그저 날마다 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그 마음.
그냥 시끄럽고 싶지 않은.
우리 지금 비겁하다!
그런데, 그것도 선택이다.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