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축제 먹거리장터에 나흘을 손 보태다.
각 읍면 단위마다 새마을협의회 회장단들이 꾸리는 식당.
대해리 부녀회장인 관계로다가.
꼭 10년 전에 부녀회 일을 보았고, 그때도 그랬던.
덕분에 10년만에 축제장을 가보았네.
여느 해라면 이틀을 나가면 되었다는데,
부녀회가 없어진 마을도 있고, 회장이 없는 경우도 있어
올해는 나흘을 다 나가야 한다지.
장소도 달라졌다.
읍 외곽에 와인터널도 생기고, 힐링 단지(레인보우 힐링 관광지)도 생겼더라고.
지난 8월의 포도축제도 그 힐링 단지에서 했다지.
정작 읍내 일을 가장 모른다.
고속도로 황간 나들목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하니.
필요한 걸 구할 때만 해도 읍내보다 고개 너머 시내로 가거나 큰 도시로 가거나.
축제장으로 셔틀이 있다지만 접근도가 좀 떨어졌다. 도보로는 쉽지 않으니.
그래서였나, 관광객이 많지는 않았더라.
와인축제장에는 좀 더 붐볐을 수도.
이틀을 가늠하고 주말은 집안 행사에 가마 했으나
손발이 모자란다니 억지로 억지로 시간을 뽑았더랬네.
나흘을 아침8시부터 나갔다.
혹 헤맬까 하여 전날 읍내 나간 걸음에 장소를 확인하다.
사전에 일을 준비하고 있던 이들을 만나 인사도 건넸던.
마지막 날은 낮 2시까지만 하고 돌아오다.
학교에 방문객이 있었던 차라.
사람들은 밤 11시에야 마감을 했다고.
차량을 같이 써야 하기도 했을 것이라.
우두령 깊은 골짝에 사는 이며는 면소재지 가까운 댁에서 몇씩 합숙을 하였더라나.
운전하는 이를 배려한.
큰 행사는 큰 행사인 갑더만.
워낙에들 일에 거침없는 엄마들이라.
뒷전에 엉거주춤 있다 살금살금 하나씩 일손을 거들다.
특히 행주를 뜨거운 물에 빨아대는 일 같은.
그런 건 잘할 수 있으니.
설거지나 하자 했는데, 그건 또 식기세척기까지 준비해서 담당한 이가 있더라고.
일 못한다고 나서지 않다가
첫날엔 김밥 재료를 준비하고 말고,
이튿날부터 마지막까지는 파전을 부쳤다.
내가 부친 것만도 백 장이 넘었을 거라.
식당들 가운데 첫날 우리 면이 매출 1위였더라는 후문을 들었는데,
나머지 날들도 그렇지 않았을지.
그게 부녀회 기금이 되는 모양인.
“그러면 일당이 나와요?”
“무슨! 안 나오면 일당을 토해내야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한 부녀회장과 나누는 대화였더랬네.
한 부스에서 못박기를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못박기.
그런 것도 상품으로 내놓아서 신기했다. 반짝이는 생각이다 싶었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 살면 그럴 일이 얼마나 있겠는지, 그 지점을 공략했겠다.
대못을 나무에 주르륵 끝만 박아놓고
여자는 일곱 번에, 남자는 세 번에 망치로 박으면 무슨 상품을 주는.
얼마를 내고 하는지는 안 물어봤고.
화장실을 다녀오다 그곳이 텅 비어있기 기웃거리며
한 번 해봐도 되느냐 물었다.
웃기는 사람이네 하는 얼굴로 쳐다보더니 해보라고 하더라.
“어! 잘하시네.”
그럼! 세 번에 박았지. 늘 하는 일인 걸, 하하.
쉬었다 하면 몸이 힘들었다.
음악이 짱짱하게 흐르고 있었다.
춤추며 했네, 운동 삼아. 내가 무슨 춤이겠는가 싶겠지만. 그냥 흔들흔들.
“저리 신나게 하는데 어떻게 안 맛있을 수가 있겠어!”
등 위에서 관광객이 그랬더라.
지역구 국회의원이며 정치인들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지역에서 오래 사니 정치적 입장을 떠나 두루 반가운 얼굴이 된다.
한 분은 마침 학교터 건으로 지난 한 해 그 보좌관과 연락이 잦았다.
누구는 정치적 색이 너무 상반된 서로가 끌어안는 모습에 의아할지도.
지역은 또 정치색이란 게 때로 무색한.
우리는 그냥 ‘아는’ 사람들이었더라.
돌아올 때 두어 가지 음식을 싸주는 어르신이 있었다.
제 맡은 음식들이 있었으니. 곁에서 말을 섞던 분이었다.
먼저 나오는 걸음이라 인사도 채 못하고 빠져 나왔더랬네.
모다 애쓰셨다.
즐거웠다. 축제장 뒤란을 아는 즐거움.
물꼬를 생각했다. 품앗이샘들을 생각했다.
물꼬가 그렇게 굴러가니까. 사람들이 기꺼이 낸 손발로.
물꼬에서 배운 대로 나가서 그리 나흘 보내고 왔다.
덕분에 고요했던 물꼬의 나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