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8.흙날. 맑음

조회 수 1160 추천 수 0 2006.02.02 11:55:00

2006.1.28.흙날. 맑음

아이는 저 혼자 아침밥을 차려먹은 뒤 닭장 문을 열어주고
하루 동안 놀 준비물을 챙겨놓고는
달골을 오르거나 동네를 한바퀴 휘돌고 옵니다.
아이가 때를 넘기도록 뵈지 않아도
적어도 이 산골에선 사람이 그를 해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대한 기계류나 사람이 휘두른 칼에 흘려진 피를 여러 차례 보며도
도시를 떠나고 싶었음을 훗날에 기억해 냈더라지요.

"닭장 문 닫았어?"
"응? 어..."
해질녘까지 기억했건만 이런, 어느새 잊었습니다.
아이를 앞세우고 닭장으로 가며 몰아넣을 생각에 까마득하더니
웬걸요, 말 그대로 문만 닫으면 되는 것이었지요.
여덟 마리 닭들은 해가 지자 집으로 다 들어가 횃대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믐밤입니다.
해가 바뀌고도 별 감흥이 일지 않는 듯하더니
설이라고 공동체식구들도 본가를 찾아 떠나고 나니
비로소 해가 가나 부다 싶습니다.
달빛 한 점 없는 밤이
새벽이 오기 전의 짙은 어둠처럼 새 해를 부르네요.
"어떨 때 엄마가 힘이 되는 줄 알아?"
"어떨 때?"
"내가 쓸쓸할 때!"
"네가 쓸쓸할 때도 있어? 언제 그래?"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또..."
아이는 이런 밤을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깊이 아이랑 산으로 들어가 살고픈 소망을 가지고 있어
마치 인적 하나 없는 산 속만 같아 한편으론 홀가분한 기쁨도 함께 한 밤입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와일드의 단편이지요.
영원히 젊다는 게 가장 아름답다 생각하고 살다
자신의 행위를 기록하는 초상화를 보며 절망했던 그레이의 서른여덟,
그리고 제 생의 어느 해도 서둘러 떠나가는 그믐밤입니다.
그대는 어떤 해를 흘려보내고 계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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