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9.해날. 맑음. 설!

조회 수 1104 추천 수 0 2006.02.02 11:56:00

2006.1.29.해날. 맑음. 설!

물 긷고 밥해 먹고 짐승들 먹이고 불 때고
먹고 사는 일에만 하루가 갑니다.
아침은 아이가 혼자 먹고
점심은 열넷이 먹었습니다, 닭 여덟 마리, 개 네 마리를 더해.
그리고 산 아래까지 내려오는 산짐승들을 위해서
아이랑 학교 동쪽 개울로 나가 곡식을 흩어두고 들어왔습니다.

설입니다.
아이는 이 산골에서 어느덧 도시에서 아비의 고향을 따라 온
아이들이 맞는 이가 되었습니다.
"작년에 봤던 걔야."
아이는 그들과 활을 쏘았고
공을 찼고
모래놀이를 하였지요.
해진 뒤엔 아이가 가르쳐주는 바둑을 두었습니다.
"어, 내가 잘 못 봤어. 물러요."
"나는 물린 적 한 번도 없는데..."
"엄마는 물려달라고 한 적 없잖아. 그랬으면 물려줬지."
"그래, 그래."

눈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엔 왼쪽이더니
엊저녁부터 오른쪽 눈이 벌개지고 눈꼽이 덕지덕지 붙습니다.
다래끼 증상인 듯합니다.
감기몸살로 거친 기침과 끓는 가래로 버거워도 합니다.
그런데 곁에서 같이 호흡하는 아이는 말짱합니다.
지난 상설학교의 두 해, 이 산골에서 아이들과 뒹굴며도 그랬습니다.
아이들의 아픈 날들이 짧아지더니 지난 학기엔 자리에 눕는 날마저 사라졌지요.
그 아이들이 이곳 삶의 긍정성을 몸으로 그렇게 증명해주었더이다.

설입니다.
신성한 안내자들이 우리 삶을 끌어주었듯 새 해도 그럴 겝니다.
그 안내자들이 어디 스승과 선배들만이겠는지요.
어느 책 한 켠 한 구절이기도 하겠고
어느 소설의 가공의 인물이기도 하겠습니다.
포도농사를 지으며 우린 <분노의 포도>를 가끔 들먹였지요.
"사람들의 영혼 속에 분노의 포도가 가득 차서 가지가 휘게 무르익어 간다.
수확의 때를 향하여 알알이 더욱 무르익어 간다."
막심 고리키며 잭 런던의 소설보다 훨씬 대중적이면서
젊은 날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어찌 해얄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던 책이었습니다.
굶주림과 분노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도 그 책을 통해 이해했던 듯하고
민중 자치에 대한 꿈도 그 책 어디쯤에서 꾸었더라지요.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두려워할 것 없다. 다른 세상이 오고 있으니까."
그런 낙관도 그 책에서 읽어냈지 싶습니다.
어머니가 톰에게 물었지요.
"앞으로 나는 어떻게 네 소식을 알 수 없겠니?"
어디에나, 어머니의 눈이 바라보는 어디에나 있다고 했습니다.
허기진 인간들이 밥을 달라고 소동을 일으키면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반드시 그 속에,
경찰놈이 누군가를 패고 있으면 거기에,
모두가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 고함 속에,
굶주렸던 어린아이들이 저녁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고
소리 내어 웃고 있으면 그 웃음 속에,
그리고
"우리 식구가 우리 손을 가꾼 것을 먹고 우리 손으로 지은 집에 살게 되면"
그 속에 있을 거라 했지요.
그때 갈릴리 바닷가에서 가장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속을 누비던
맨발의 청춘 예수라는 사나이를 떠올렸던 듯합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도록 만들었던 그 장대했던 말미야말로 결코 잊을 수가 없지요.
죽어가는 남자 곁에 누워 젖을 물리던 로저샨 말입니다.

설입니다.
우리 삶을 추스르기에 참 좋은 구실이지요.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새해엔 스타인벡의 그 거대한 책을 우리 아이들과 나눌 수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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