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26.불날. 아주 가끔 구름

조회 수 1222 추천 수 0 2006.09.29 17:48:00

2006. 9.26.불날. 아주 가끔 구름


아이들이 학교로 내려갑니다.
길섶 밖으로 아직 초록은 짙어
닦아놓은 농로가 참 하얗기도 합니다.
그러다 생각이라도 퍼뜩 난 듯이 바람이 깔아놓은 감잎들을 만나지요.
우수수 떨어져 내린 감잎 위에서서 고개를 한참은 들고 올려다보아야 하는
감나무 한 그루 거기 서 있습니다.
겨우 차 한 대 지나던 길이 아주 훤해져 있었지요.
얼마 전 김상철아빠가 아이들 지나는데 뱀으로 놀랄까
긴 달골 오르는 길의 풀을 죄 베어주셨습니다.

“말해보세요.”
무어라 말 좀 하랍니다.
모기 한 마리가 와서 읽어주는 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을 맴돌고 있었지요.
요새 벌레들과 얘기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입니다.
비켜 달라 했더니
그가 정말 책상 모서리로 가서 책을 다 읽는 동안 붙어있었지요.
‘사회’가 끝날 무렵 들어온 벌이 있어
아이들이 방석으로 이리저리 몰던 일도 있었습니다.
닫혀있는 교실 맨 뒤의 창문 위에 그가 있었는데
열려있는 문은 맨 앞이었지요.
눈길을 따라 오라 하였습니다.
그는 눈길을 따라 와서 열려있는 창으로 나갔지요.
저녁에 가마솥방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습니다.
사납게 생긴 녀석이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고
모두 잡으려고 애썼지요.
괜히 아이들 괴롭히지 말고 내 피나 충분히 빨고 가라 불렀더니
그 모기 어찌나 오랫동안 손목에다 침을 꽂고 있던지...
그런 다음 정말 밖으로 나가서
우리 모두 입이 벌어졌더랍니다.
그런데, 먹고 먹히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우리도 벌레를 죽일 때가 있지요.
모기가 대표적일 겝니다.
그를 잡을 때도 이 나쁜 놈, 하는 날선 마음이 아니라 축복해주기로 하였습지요.
그리하여 벌레를 하찮은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지적(?)존재로 보자는 것이 요새 우리들의 주장이랍니다.

단소 연습 뒤 영남농악 자진모리 가락을 익혔습니다.
오늘은 징도 꺼내놓았으니
사물이 다 모인 거지요.
세 모둠으로 나뉘어 고루 악기소리가 나도록 자리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장구와 쇠는 제 악기를 두고
북이 있는 자리는 돌아가며 앉아 악기를 고루 다루었지요.

일하러 나갔습니다.
널어놓은 호두껍질을 벗기기로 하였지요.
껍질은 옷감 물들이는데 쓰이도록 한 쪽에 모아두고,
알맹이는 잘 비벼 씻어 바구니에 담아 물을 뺀 뒤
너른 평상에 널어두었습니다.
오며 가며 참새 방앗간처럼 까먹느라
곳간에 들어갈 게 있기나 할까 모르겠네요.
올해는 영 호두가 귀한 이곳입니다.

곶감집 염소 복순이(저는 늘 ‘사자’라 불러주었답니다)를 장순이가 물었습니다.
사지로 끌려가는 아이소리가 온 마을을 울려
애고 어른들이 몰려들었는데
벌써 사자는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장순이에게 약이라도 올린 겐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장순이가...”
“장순이 잘못이 아냐. 어른이 잘못한 거지.”
아이들이 때늦게 달려온 다른 아이들에게 장순이를 뭐라고 하자
상범샘이 사자를 잘못 묶어둔 어른의 실수라고 얼른 고쳐 말해줍니다.
장순이를 들여다보았지요.
산책 한 번 나갈 일 없는, 천지를 뛰어다니고픈 진도산 장순이,
그가 얼마나 갑갑했을까요?
한가위방학에는 그를 풀어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달골에선 책 이야기가 한창인 요즘이지요.
“벌레랑 대화하는 게 별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걸 이해하거나 또 같은 경험을 한 예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제 차례가 되었네요.
최근에 찾은 곤충 관련 책 한 권에 대해 들려줍니다.
파리에 대한 것이었지요.
우리가 흔히 콜레라균의 전염매개체로 알고 있고
귀찮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존재라고만 알고 있는 그에 대해
정말 그러한가 묻는 책이었습니다.
“다른 건(벌레) 어때요?”
“바퀴벌레는요?”
그래서 벌레(곤충을 포함한)에 대한 자료들을 더 찾아 들려 주겠다 하였지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우리들 시간이 이 가을처럼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읽어나가는 책들도 재미납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어떻더라, 덧붙이기도 하였지요.
“와, 옥샘은 책 다 알어.”
제법 책에 조예가 깊은 이가 되어있었지만
그래보았자 읽은 책이 얼마나 되려구요.
고전문학이란 게 그렇습니다,
시대를 넘어 세대를 넘어 읽히고 또 읽히지요.
그래서 아비와 아들이, 어미와 딸이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데 그 책들이란 게 초중고를 다닐 때 읽은 것들입니다.
대학 때야 사회과학서적을 읽느라 다 보냈고
이후로는 생태 쪽 책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지금이야 신문도 보지 않는, 활자로부터 멀어지려는 삶이니
고전문학에 대한 것이라면 순전히 그 옛적시절에 보았던 게 다지요.
그러니 그 때 읽었던 책들이 제 생의 신성한 안내자들에 끼여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이 읽고 있는 책들도 그러할 테지요.
이들의 삶이 어디로 나아갈까 자못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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