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2.17.흙날. 비

조회 수 1219 추천 수 0 2007.02.22 01:05:00

2007. 2.17.흙날. 비


“눈썹이 하얘지지.”
섣달그믐날 밤, 태산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다 올리다
그만 잠이 들어버리던 어린 날이었습니다.
“거울 봐라.”
해마다 꼭 같은 말을 설 아침에 눈뜨자마자 들었건만
마치 처음처럼 놀라곤 하였지요.
“앙, 앙, 진짜 하얘졌다.”
할머니가 외손녀 눈썹에 밀가루를 묻혀놓은 걸
끄트머리 이모 둘이 그리 놀릴라치면
장난인 줄 알면서도 약이 올랐습니다.
야광귀가 신고 갈세라 신발을 뒤집어 두기도 하였지요.
귀신이 비 가닥이나 쳇구멍을 세다가 닭울음에 달아나도록
빗자루나 체를 걸어두기도 했던 그믐밤이었습니다.
엷은 웃음이 번지던 그 밤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던 게
서해의 단편 <그믐밤>을 읽으면서부터였던지
화염병 뒹구는 거리에 있었던 스무 살 나이 때문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느새 다시 그 시간만큼의 나이를 더하게 되었고,
온통 산으로 둘러친 두메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온 동네 집집이 불을 밝힌 야삼경,
마을 고샅을 걸어봅니다.
섣달그믐밤입니다.

“편식하지 말라고...”
아이는 제(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닭모이로 사료와 등겨를 섞어주고
가마솥방에서 나온 야채껍질들을 챙겨서 넣어주데요.
아침 10시와 저녁 7시에 맞춰 가마솥방 난로에 연탄을 갈고,
낮 4시엔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옵니다.
개밥을 주러 가면
책방 바깥문 앞에 놓인 커다란 주전자에 물을 길어 따라오지요.
“오늘은 알을 열 개나 낳았어요!”
오전에 학교를 맡겨두고 황간에 나갔다 왔더니
학교를 지키고 전화도 잘 받아두었더랬습니다.
옛적, 열 살이면 집안의 큰 일꾼이었지요.
오후엔 같이 만두를 빚는데,
야물게도 빚습디다.
같이 코믹영화도 한 편 보고 바둑도 두고
아궁이에 불도 지폈지요.
물이 데워지자 아이는 양말을 빨아 솥뚜껑에 잘 널어놓고
날적이를 쓰더니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한 세대가 늙어가고
또 한 세대가 이렇게 성큼 자라납니다.
세상 일,
그리 걱정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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