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10.해날. 맑음

조회 수 1236 추천 수 0 2007.06.22 23:12:00

2007. 6.10.해날. 맑음


오후에 흘목 내 건너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이철수아저씨가 고자리에 소를 치러 올라간 뒤
비어있는 흘목 집을 민박을 내면 어떨까 봐 달라 해서
그 동네도 들여다볼 겸 가봅니다.
“교장선생님이네...”
아, 저 아저씨도 저어기 아저씨도 다 예 사시는 구나...
다 안면이 있는 분들이셨지요.
대해리에 들어와 산지도 오래다 싶었습니다.
계곡은 깊고 절경이었으며
작은 마을 고샅은 아름드리 나무로 그늘 짙었습니다.
계곡에서 오르는 바람으로 어찌나 시원키도 하던지요.
골골이 집을 이루고 골골이 사람들이 삽니다.
개미가 그들의 집을 짓고 그들의 마을 이루고 살듯
지렁이가 그러하듯 새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또한 그러합니다.
온 동네 공병을 수거하고 다니는 류옥하다선수,
쌓여있는 병을 지나칠 리 없지요.
철수아저씨한테 들통도 빌리고
어데서 자루도 하나 챙겨들고 와서 그 마을 병들을 죄 실어도 날랐네요.

매실효소를 담았습니다.
작은 항아리에 겨우 차는 양이지만
두세 달 절여놓았다가 거르면 여름날 매실쥬스로 한철은 먹을 겝니다,
아이들 배앓이에 약으로도 쓰고.
짬짬이 이런 갈무리들이 즐겁습니다.
농사짓는 재미들이 이러한 것이겠습니다,
내 거둔 것들로 먹을거리를 삼는 일.

감잎도 쪄냈습니다.
감잎차이지요.
커다란 바구니에 아이가 따온 감잎을
가운데 잎맥을 잘라내고 있는데
거의 바닥이 드러난 바구니에 빠알간 앵두가 깔려있었습니다.
“선물이야.”
아이랑 사는 일은 이런 느꺼움이지요,
숨어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얼마 전 아이는 돼지를 잡았습니다.
두어 해 모았던가요.
한 꾸러미 목돈을 만들어 묶고(공동체식구들 제주도여행 보내주겠다는 돈입니다)
나머지 짜투리를 비닐에 넣어두었더랬는데
오늘 그 비닐주머니를 들고 와
달골에 집 지으며 진 공동체 빚 갚는데 보태라고 내밀었습니다.
“그런 걸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아무리 작아도 다 힘이 되는 거야.”
그러면서 엄마 읍내 나가는데 기름값도 하라네요.
“상촌 경운기고치는 아저씨가 나 이쁘다고 준 2000원도 보태.”
몇 천원으로 온 데 생색을 다 낸 아이입니다.
“내 용돈이 한 주에 300원인데, (이거면)얼마나 큰 돈인데...”
그에게야 물론 거금일 테지요.

오후 출출할 쯤 아이랑 마당에 나가 앵두를 따먹고
볼똥을 따먹었습니다.
비로소 ‘사람’ 같았지요.
불을 쓴 요리가 아니라 이런 채취로 얻는 먹을거리를 입에 넣을 때
정말 사람같이 느껴집니다.
야생의 삶을 회복하고픈 소망을 갖고 있지요.

두레상이 있는 날입니다.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더랬습니다.
“그래, 무슨 얘기들이 오갔니?”
“사는 얘기했지.”
아이에게 물었지요.
“너는 무슨 얘길 했는데?”
“뭐, 농작물 키우면서 들고 난 생각을 말했지.”
“무슨 생각이 들었는데?”
농작물이 꼭 사람 말대로 크는 게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다 자기 개성대로 자라는 것 같다,
그런 얘기를 했다 합니다.
다섯 평 밭뙈기를 갈아먹는 열 살 농사꾼의 깨우침,
저런 게 배움이겠다 싶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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