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23.흙날. 차츰 흐리다 저녁 창대비 / 시카고행



오늘날 이처럼 집안이 패잔(敗殘)하긴 했지만, 다른 일가에 비하면 오히려 부자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줄 힘이 없을 뿐이다...

여러 날 밥을 끓이지 못하고 있는 집이 있을 텐데 너희는 쌀되라도 퍼다가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눈이 쌓여 추워 쓰러져 있는 집에는 장작개비라도 나누어 따뜻하게 해주고, 병들어 약을 먹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푼의 돈이라도 쪼개어 약을 지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있는 집에는 때때로 찾아가 무릎 꿇고 모시어 따뜻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공경하여야 하고, 근심걱정에 싸여 있는 집에 가서는 얼굴빛을 달리하고 깜짝 놀란 눈빛으로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항상 공손하고 화목하며 삼가고 자기 마음을 다하여 다른 일가들의 환심을 얻는 일에 힘쓸 것이지 마음속에 보답 받을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라. 뒷날 너희가 근심 걱정할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보답해주지 않더라도 부디 원한을 품지 말 것이고 바로 미루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이 마침 도울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도와줄 힘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할 뿐,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전번에 이리저리 해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구나!”하는 소리를 입 밖에 내뱉지 말아야 된다. 만약 이러한 말이 한번이라도 입 밖에 나오면 지난날 쌓아 놓은 공과 덕이 하루아침에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p.58-59)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靑雲(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를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p.173)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 것이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p.174)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박석무역/창비/2001) 가운데서


한동안 멀리 길 떠나는 이를 위해
한 선배가 곱씹을 글들을 가려 보내주었습니다.

달골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지요.
4시가 넘어 되어까지 학교와 간장집(사택)과 달골 햇발동에 올라 손을 좀 보았습니다.
이제 짐을 꾸려야지요.
시카고에 갑니다.
어째 다 챙겨 넣고도 크지도 않은 가방이 헐렁합니다.
꼭 빠뜨린 게 있을 것만 같이.
나갈 일이 잦으니 이력이 났나 보지요.
사람 사는 일이 이리 가방 하나의 무게로 살 일이건만...

달골 콩밭부터 듭니다.
공동체에 식구가 없는 것은 아니나
태평농법으로 짓겠다며 제가 시작한 밭입니다.
주인 발자국 소리에 큰다는 작물들이지요.
곁에서 아침저녁 발걸음 소리를 내며 얘기를 나누던 이가 없고 보면
아무래도 쓸쓸하지 않을지요.
목마른 여름날이 길기도 길지 않을는지요.
멀리서도 아침저녁 노래를 보내마 합니다.
씩씩하라 합니다.

달랑 남정네 셋만 남기고 갑니다.
공동체식구 가운데 나머지 셋은 시카고에서 7월을 보내는 거네요.
(기락샘도 9월이면 5년 미국생활을 끝내고 돌아옵니다.
제가 돌아오던 그때처럼
역시 “왜 굳이 들어가려하느냐?”는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남한사회 '안'에서 뭔가를 하려할 테지요.)
7월 27일 쇠날 대해리로 돌아올 량입니다.
오자마자 계자가 시작되겠지요.
종대샘이 이른 아침부터 전주에서 와 실어주었습니다.
대전도 들리고 길에서 일곱 시간을 보내고 공항에 도착했지요.
도쿄로 가는 저녁 비행기입니다.
이번에는 하룻밤을 일본에서 묵고 갑니다.

물론 ‘물꼬에선 요새’도 당분간 멈추지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더운 날이 이어지겠지요.
차라리 그 더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면
견디기 더 수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눅눅한 날도 오래겠습니다.
날이 갤 땐 잠깐 마음도 거풍하소서.
그리고 가끔 물꼬로 소식 전해주셔요,
대해리에 남아있는 이들이 행여 사람이 그립지 않도록.

어느 순간에나
‘내가 잘 쓰이는 삶’을 고민하는 것에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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