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11.불날. 맑음 / 널 보내놓고

조회 수 1447 추천 수 0 2007.09.25 01:37:00

2007. 9.11.불날. 맑음 / 널 보내놓고


< 아우를 보내놓고 >


잘 갔느뇨?
어제 널 보내놓고 이적지 전화도 넣지 못했구나.

점심 차로 나간다던 네가 열한 시께 서둘러 떠난 뒤
아이들과 하던 공부를 마저 하고
그 아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동안
세면대 수도에 낀 먼지며 세탁기도 닦고
‘작은 씻는 곳’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세제 통 뚜껑에 쌓인 먼지도 왜 그리 거슬리던지.
걸린 칫솔통에 낀 검은 먼지며
물받이 들통과 세수대야에 낀 물때, 빨래판 골에 붙은 땟자국,
비누에 붙은 머리카락, 타일 사이에 낀 곰팡이,
솔로 문지르기 시작하니 예제 자꾸 눈에 띄는 거다.
이것만 하고 일어서서 부엌일 봐야지,
그래놓고도 손은 아직 게 있었더란다.
식구들 점심밥상을 차리러가니
가마솥방은 널부러진 것들이 채우고 있었지.
사택 간장집 지붕수리 하는데 새참을 내고 그대로 둔 도마와 칼,
점심을 위해 담가둔 당면,
우기에 그만 짓물러져 까놓은 양파들,
복분자효소를 거르고 남은 걸로 만든 잼은 식히느라 열려 있었고,
효소항아리에서 꺼내 방망이로 쳐서 씨를 빼낸 매실은 한켠에 밀려있고,
밀가루 흩뿌려진 조리대,
벌레 먹은 게 더 많은 주워온 밤,
그래 그런 건 농사짓는 이 차지지,
벌레집이 보이는 삶은 밤,
나와 있는 얼린 김치, ...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데,
아, 네가 가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걸 다 벗어던지고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꼬질꼬질한 일상이 주는 녹진함에서
아주 가끔 우리에게 찾아드는 그런 감정처럼
맛난 점심이 기다리는 어딘가로 네가 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깔끔한 휴게소로, 음식점으로,
아니면 어머니의 밥상이 있는 네 정든 집으로.
종종거리며 다니는 누이한테 애처로움이 또 일진 않았을까나,
이 좋은(?) 시대에 아궁이 앞에서 쭈그리고 불 피우고 있는 여식이
못내 가여워라던 울어머니 마냥,
추위도 못 견디면서
찾아들어도 어찌 이리 추운 곳에 들어왔냐며 속상해라던 당신처럼.

그런데 얘야, 그게 일상이다.
그게 사는 거다.
누군들 밥 안 먹고 똥 안 누고 살더냐.
우아한 백조도 물 아래 발이 어떻더라는 얘기도 있지 않더냐.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건 그런 것들이다.
일상을 채우는 소소함이 주는 기쁨,
그것이 이 산골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단다.
날이 개고, 감이 익고, 담쟁이덩굴이 붉어가고, 선선한 바람이 다녀가고...
키운 버섯을 들고 이웃집을 건너가고,
밥 때 스민 객을 위해 급히 냄비밥을 짓고,
그리고 꾸질꾸질하고 냄새나는 것들을 치우며 개운해하고, ...
사는 데 무에 그리 별스러운 게 있더뇨.

그런 생각도 들데.
넘의 집에 가서 나올 때 만회(?)할 기회를 줘야지.
흩트려진 것들을 치울 수 있고
개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겠다.
너저분하게 널린 것들만 보고 떠난 네게 괜스레 멋쩍어서...
산골 누추한 삶에서 보내는 마음이 그러했더란다.
내가 좀 소심하지 않더뇨.
알지,
괜찮다, 다 괜찮다, 지낼 만하다, 아니, 참 좋다, 누나 맘 쓰지 말아라,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말들이 그런 낱말들을 대신 한다는 거?

또 오려무나.
다니며 운전 조심하고.

아, 전에는 ‘가치 있고 의미롭게’, 라고 너를 볶았던 갑다.
맘 편한 게 젤이다.
아무쪼록 편하거라.
스스로 평화가 되면 세상도 평화가 되지 않겠느뇨.
마흔이 적은 나이냐, 이왕이면 짝도 맞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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