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8. 해날. 우중충해지던 오후 억수비

조회 수 1426 추천 수 0 2008.06.23 16:04:00

2008. 6. 8. 해날. 우중충해지던 오후 억수비


섬초롱이 어디 갔나 싶더니
피기 시작하여 학교 대문을 밝혔습니다.
정해진 그 때에 나오기도 하지만
때마다 또 다르기도 한 꽃들입니다.
저마다 자기 삶의 흐름을 잘 찾지요.
사람이라고 어디 다를까요.
사람 생명의 흐름, 그런 게 있을 겁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까닭도
잊어버린, 혹은 잊힌 그 생명의 흐름을 찾고 그리 살고픈 의지 하나이겠습니다.

일이 참 많은 산골살이입니다.
여기 가면 간 걸음에 여기서 일 한바탕,
그러면 반나절이 성큼 가고
저기 가선 저기 간 길에 게서 할 수 있는 이리 한 꾸러미,
그러다 부엌에 들면 주중에 먹을 밑반찬 좀 하고...
오늘은 큰 결정 하나를 내렸더랬습니다.
사람 하나 살자고 몇 해 자란 나무를 베는 건 늘 쉽지 않지요.
간장집 남새밭에 그늘이 너무 짙었던 감나무와 측백나무,
기락샘과 젊은할아버지가 큰 가지를 베어냈습니다.
아이는 그 아래 자신이 키우는 해바라기가 상할까
노심초사였지요.
저는 또 거기 간 새 부추밭에 주저앉아 풀 다 맸더랍니다.

“단오라고...”
아, 잊고 있었는데,
오월 단오입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돼지머리 사다가
온 동네 떠들썩하도록 여흥이었습니다.
농사일에 좇기다 하루 이렇게 또 쉬어가는 거지요.
어르신들이, 와서 노래 한 자락 하라셨습니다.
여전히
소주 한 모금이라며 내미는 게 국대접 반 그릇일 겝니다.
지레 얼른 도망갔지요.
장구 한 가락 쳐드릴 수도 있었으련만
우리는 평소에 게으르니(정확하게는, 농사일에 서툴러 더디니)
오늘도 일에 서둘러야 한답니다.

“딸기랑 오디 따러 가요.”
후두둑 오디가 뛰어내리는데,
딸기는 벌써 숨을라 하는데,
농사를 짓는 것보다 채취에 관심이 많고
자연이 준 것을 더 잘 거둘 줄 알아야 한다 말하면서도
그거 하나 딸 짬이 어렵습니다.
“그래, 그래,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하던 일을 다 놓고 아이랑 나갔습니다.
길바닥에 떨어져 내린 것 많았으나
아직 오디는 더 짙어도 되겠데요.
학교 큰 마당의 딸기는 다 따냈습니다.
제법 양이 되어 쨈도 한 항아리였지요.
아이가 어찌나 뿌듯해 하던지요.

저녁 6시, 신(神)이 다녀갔습니다.
인간이 잊을 만할 때 그렇게 존재를 보여주지요.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퍼붓듯 비가 내리고
번개가 요란하였으며 마을에서 머지 않은 곳에 벼락 떨어졌네요.
아이랑 왜소한 어른과 여자, 우리는 떨고 있었습니다.
얼른 초부터 준비해두고
창문으로부터 몸을 멀리 두고...
지진을 피해 모두가 떠난 곳에 홀로 남았던 스님이 계셨지요.
모두가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을 때 그가 그랬답니다.
“나도 무서웠어.”
“그런데 왜 도망가지 않으셨어요?”
“내 안으로 숨었지.”

진주의 한 논두렁이 보내준 경옥고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자체 발전량이 모자라면 밖으로부터 힘을 줄 수도 있겠지요.
“계자 준비다.”
정말 이제 서서히 계자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거르지 않고 먹는 일이 수월찮습니다.
그래서 약은 챙기는 정성이라던가요.
“‘엄마, 경옥고!”
아이가 보이는 곳에 단지를 놓고
아침 저녁 엄마를 불러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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