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23.나무날. 짙은 안개

조회 수 1219 추천 수 0 2008.11.02 16:36:00

2008.10.23.나무날. 짙은 안개


가을입니다.
동갑내기 한 친구가 다가왔습니다.
툭툭 치며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했지요.
어제가 생일이었다 합니다.
이혼을 하고 늦게 새로운 직업을 찾아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작은 일로도 외롭기 쉬운 가을이겠습니다.
그저 곁에서 같이 수다를 좀 떱니다.
삶을 야물게 잘 꾸리며 끌고 가는 그가 참 고맙습니다.
서른을 넘긴 또 다른 한 친구가 달려와 인사를 합니다.
공부를 좇아가는 건 그저 하면 되는데,
친구가 없다는 게 어렵답니다.
그런 속에 다들 삶을 어떻게든 건너가고 있습니다.
가을입니다,
마음 신산하기 쉽겠습니다.
얼마 전엔 미국인 친구 하나가
주차장에서 절 붙들고 오래 토로를 하고 있기도 하였지요.
그런 속에 모두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끔 이렇게 어깨를 기대며.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땐
잠자리 맡에서든, 아님 공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눅진하거나 쌀쌀한 날엔 이불을 펴 놓고 발을 모은 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줍니다.
언젠가 읽어주었던 책을 아이가 자라 저 홀로 읽기도 하데요.
두어 해전 날마다 조금씩 읽어주었던 장편을
오늘 아이가 펼쳐들고 있었습니다.
핵전쟁을 치른 인류의 얘기였지요.
“엄마, ‘웃을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야.”
“무슨 말이야?”
웃는다는 건 지금 좋다는 뜻이랍니다.
웃을 수 있다는 것, 배가 부르고 좋다는 것, 따뜻하다는 것,
이런 문장들이 행복을 일컫는 것과 동일하다는 거였습니다.
“계속 사람들이 죽으면 웃을 수 있겠어?”
그렇겠습니다.
아이를 통해 배우고,
아이를 통해 걸음을 멈추고 사유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어떤 대학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거기 로비에 웬 대야들이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하며 위를 쳐다보니
저 위에서 비가 새는 모양이었습니다.
떨어지는 빗물을 받고 있는 거였지요.
“등록금 받아서 이런 거나 좀 고치지...”
아이가 옆에서 한 마디 합니다.
이 정도 크면 대학이 등록금 받아서 굴러가는 것쯤은 짐작하나 보지요.
“불꽃놀이 같은 거 하지 말고 지붕이나 고치지...”
축제 때며 흔히 대학의 행사에 등장하는 불꽃놀이를 말함은 물론이겠습니다.
“천만 원은 한 대, 불꽃놀이 제대로 할려면.”
어디서 또 들은 풍월일까요.
어쨌든 아이도 돈의 적절한 쓰임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요.

아이랑 멀리 다녀오는 길은 당연히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지요.
주로 음악을 듣습니다.
아이랑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는 공간이 되기도 하구요.
“나는 음악이 참 좋아. 이 음악 감미롭지 않아?”
감미롭다는 말은 아이는 정말 아는 걸까요?
음악의 긍정성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이지요.
아이는 연주되는 음악들을 통해
브라질의 열대우림을 연상하기도 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중앙사막을 떠올리기도 하며
스웨덴의 뒷골목을 더듬거리기도 하였습니다.
“엄마, 이 음악, 서부를 횡단하는 것 같지 않아,
길 양쪽으로 끝없는 벌판이 끝없이 나타나고...”
음악 공부가 따로 없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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