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1-13.해-물날. 눈, 눈

조회 수 1579 추천 수 0 2009.01.27 15:15:00

2009. 1.11-13.해-물날. 눈, 눈


임실 다녀왔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대해리를 빠져나갔지요.
전주의 종대샘 본가에서 하루를 묵고 넘어갔습니다.
여전히 눈이 내렸네요.
어둠 내리기 전에는 나오자 하고 간 걸음입니다.

‘순례자공동체’라고 이름한 곳입니다.
공동체라 하여 여러 가족이 모여 사는 건 아니고
목회를 하시는 분의 다섯 식구가 함께 흙집을 짓고
농사짓고 사시지요.
“이름만 있는데...”
굳이 공동체라고 부를 것도 없다셨지만
어거스틴에 따르면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순례의 공동체이며 예배와 덕성함양의 공동체라는데
아마도 거기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목사님은 화목보일러의 아궁이에서
완전연소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 분으로 강호(하하)에 알려져 있는데,
자립적 에너지에 대해 가져왔던 관심으로 연이 닿게 된 분이십니다.
그것 아니어도 청국장이며 치즈며 유산양을 기르는 일,
그리고 손수 짓는 흙집에 관심 있는 이들이 찾아들기도 한다지요.

순창을 향해 가다가
옥정호가 있는 섬진강댐관리사무소를 거슬러 올라갔지요.
거기 마을과 툭 떨어져 샛길 하나 있었습니다.
전주에 사신다는 동생분네와 함께 가정목회를 보려던 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 하나를 놓고
같이 예배를 본 뒤
아궁이에서 생굴을 구워먹었습니다.
산골에서 맛보는 생굴이라니...
거실과 밖을 연결하는 큰 창으로
눈 나리는 바깥이 안이 되고 있었답니다.
백석의 눈이 내리고
브뤼겔의 사냥꾼들이 돌아오는 눈 속에서
시골 사는 이들, 사람들과 모여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깊어갔습니다.
작은 연주회도 있었지요.
천재 피아니스트가 거기 있었던 겁니다.
한의가 들려주는 쇼팽의 곡들이며가
겨울의 오후를 가득 채워주었습니다.
이야기는 본론에 이르러
화목보일러 앞으로 가서 손수 만드신 연소관도 작동시켜보고
(최근 호주 쪽에서 실용단계에 이르렀다는
브라운가스가 이런 거 아닌가 넘겨짚어도 봅니다)
유산양 키우는 이야기와 토굴 판 이야기,
그리고 그 토굴에 들러 치즈가 익어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물꼬에 대해서도 이러저러 소식을 접하고 계셨지요.
대단타시데요.
어떤 의미냐 하면
주로 귀농하려는 이들을 만나면 대부분 여자들의 반대에 부딪히는데
여자가 시골행을 결심했다는데 박수를 쳐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산골에서 겨울을 나는 일이야말로,
더구나 없이 사는 살림이 고단키는 하니까요.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연대,
뭐 그런 것이 생기면 이야기는 더욱 재미가 있어지지요.
연신 상에는 먹을 것이 오릅니다.
구운돼지감자 차가 쉼 없이 나오고
들고 간 유기농 사과에 야콘 샐러드, 그리고 고구마 튀김,
와인과 치즈가 이어지더니
기어이 저녁밥상까지 나왔고
하룻밤 묵어가라 청하셨습니다.
2월에 또 들리마 하며 그걸 뿌리치고 나서는 길,
으윽, 그새 어마어마하게 내린 눈은
차를 미끌거리게 했습니다.
모두 출동해서 길을 쓸고 모래를 뿌리고...
무슨 작전수행이었다지요.

그리고 차가 한 대도 없는 10킬로미터 강을 따라 난 길을
1시간여 만에 빠져나옵니다.
“나는 걸어가면 안돼?”
아이는 차가 비추는 등 앞으로 달려가고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눈에 막혀
오는 길에 다시 전주에서 밤을 묵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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