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9.달날. 맑음

조회 수 1060 추천 수 0 2009.03.27 06:42:00

2009. 3. 9.달날. 맑음


저녁을 먹고 마당에 나왔을 때였습니다.
“아!”
서쪽 하늘에 달린 계명성이 어찌나 밝은지
뉘 집에 불 밝힌 줄 알았습니다.
산골의 삶은
자주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것 같은 기쁨을 불러옵니다.
그것이 특별한 날이어서가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 안에서 발견되어 환희가 더하지요.

“종을 하나 구해놨습니다.”
세상에, 하나로마트의 손영현 상무님의 전갈입니다.
이런 학교에는 종이 있어야는데,
다녀가시며 마당가에서 내내 아쉬워하셨더랬지요.
이 학교 공간 쓰기 시작한 건 1996년 가을부터였습니다.
91년도에 폐교된 학교였지요.
아직 살림이 서울에서 완전히 내려오기 전
계절학교 용도로만 이곳을 쓰고 있을 적엔 멀쩡히 있던 것을
서울 공동체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상주하기 시작했을 무렵
학교를 잠시 비웠던 어느 날 사라져버렸던 종이지요.
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나무날에 그곳에 간다 하니
안내대에 맡겨둔다셨지요.
고맙고 송구하고 그랬답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에서의 문화적 공백 기간입니다.
만 세 살을 갓 넘긴 아이랑 손 붙잡고 비행기를 타서
일곱 개 나라의 여러 공동체와 옛 건축, 자유학교들을 좇아다녔지요.
서울에서 나가 바로 영동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서울살이의 공백은 더욱 오래되었네요.
2002년 온 나라가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을 때도
불도 없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 산골에서 보냈더랬습니다.
특히 그 시절 화젯거리가 된 책 같은 건 잘 모르는 거지요.
물론 책이란 것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고전은 어느 때고 읽히기 마련이지만,
말하자면 그 시대를 풍미했던 책의 느낌으로부터는 분명 멀었지요.

자료를 하나 찾다가 <아름다운 집>을 발견했습니다.
2001년산입니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 조선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열여덟 살의 청년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쓰기 시작한 일기의 첫 구절로 시작합니다.
“앞으로의 삶에서 스스로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엄정한 시간이 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오늘의 조선이 대학인에게 요구하는 지식인의 책임 앞에서 결코 뒤돌아보거나 옆을 보지 않겠다’ 다짐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기,
그리고 오늘(여전히 갈라진 조국)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를 견지하며 살아간 인물의 일기가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지요.

“마침내 오고 있다, 그날이”
결과적으로 외적 힘에 의존한 해방이었으나
실제 얼마나 뜨겁게 우리가 조선독립을 위해 분투했던가요.
조선공산당사를 읽으며 가슴 떨렸던 20대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순결함을 좇아 살고자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이 조선로동당으로, 남로당과 북로당으로,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사회주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세습체제로 권력이 구축되는 흉물이 되어갔지만
여전히 사회주의가 지닌 뜻의 유효한 진정성에 가슴 떨렸고
책은 그 시간을 고스란히 재현해주고 있었습니다.
‘실존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가
사회주의 사상의 몰락으로 이어질 아무런 이유가 없지요’,
그들이 사회주의 사상대로 산 것이 아니므로.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날 새벽 집을 떠나는 아비에게
네 돌 바기 아들이 말합니다.
“아부지 어디 가는지 난 다 안다... 혁명하러 가시죠?”
“우리 아들이 혁명이 뭔지 알까?”
“...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살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거예요. 맞죠?”
아, 아름다운 집...

사람 중심의 사회주의,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를
조선에 참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변화하라며
현 북한 권력 중심의 김정일 동지에게 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아직 오지 않은 동지들에게 보내는 글로 책은 끝을 맺습니다.
“삶의 허무의식은 한낱 사람의 편견... 온전한 사회주의 국가는 아직 지상에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회주의를 이 지상에 내오는 것 바로 그것이 당신의 과제입니다... 지상의 사람이 궁극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존재인 한,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는 존재인 한 혁명은 더디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수많은 이들이 제 몸 속에 살아 숨쉬었듯이 저 또한 당신의 몸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삶은 그 뿌리부터 나눔이요, 사랑인 까닭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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