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14.달날. 비
특수학교의 수업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듣지 않고 있었습니다.
들을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요?
수업이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담당교사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도 자주 되물어본다셨습니다
(물론 인지연령과 생활연령의 차이는 있지요.).
그런 속에 현 정부는
학습 인지도신장을 위한 수업을 더욱 요구하고 있습니다.
몰아가고 있는 거지요.
참...
울산의 아이 하나가 흉부 수술을 위해
서울 큰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이들의 큰일들마다 산골까지 소식 넣어주어 고맙습니다.
물꼬가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마음이나 모으는 것이나
그런 기운들이 모여 혁명도 일으킬 수 있는 것 아닐는지요.
아무쪼록 원활하길 바랍니다.
소희샘의 연락입니다.
초등학생이던 그 아이 자라
낼모레 대학 졸업쇼를 합니다.
디자인한 옷이 담긴 책자를 보내왔지요.
저녁에는 취직 소식도 함께 닿았습니다.
아, 잘들 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책자에서 이리 쓰고 있었지요.
“...디자이너란 배려하는 사람이다. 나 자신만 만족시키는 작품이 아니라 남이 인정하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게 디자인이다. 그런 배려 없이는 결코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가 제도학교를 경험하는 보름,
아이는 굉장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고민입니다.
하루 체험을 한 뒤 더는 다니고 싶지 않다는 아이를
그래도 가봐라 했던 지난 2주였습니다.
아이를 내몰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아침 시작 시간에 맞춰야 하니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이를 깨우는 게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아무래도 안보내야겠다 했지요.
그런데 아이가 그럽니다.
“뭘 하기로 했으면 한 달 아님 석 달 정도는 해봐야지!”
그리고 또 가방을 메고 갔더랍니다.
고민합니다,
교사로서 그리고 학부모로서의 고민이 동시적입니다.
이미 결정한 길을 간다고 해서
내적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고
갈등은
그 앞에 볼 일 보러가는 이의 화장지처럼 따라 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잡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를 가거나 가지 않거나,
아니면 학교를 바꿔내거나 하면 될 일이겠지요.
요즘 아이랑 보내는 과정이
제 머리 속을 외려 명백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깨끗하게 비워주고 있습니다.
역시 학교제도는 ‘아닌’ 듯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