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 1.나무날. 오후 흐려지는 하늘
한가위 장을 보러나간 길이었습니다.
낼부터 연휴이지요.
올해는 주말과 겹쳐 사흘입니다.
사람들이 바쁘겄습니다.
그런데 한정 없이 가라앉고 있었지요.
잠시 길을 틀어 산기슭에 차를 세우고
산사 길을 걸었습니다.
깊이 든 감기 때문만이 아니었을 겝니다.
늘 사람들 ‘사이’를 살아내는 일이 누구에게나 숙제일 테지요.
바위솔은 정말 바위를 타고 발돋움을 하고 있습디다.
가끔, 아주 가끔 속이 이렇게 시끄러울 때
산에 사는 것들 사이를 거닐며
그 속을 탈탈 털어 다 놓고 돌아온답니다.
동물도 자살을 한단다, 로 시작하는
글을 한 통 받았습니다.
수년 전 돌고래가 떼로 죽어 수면에 떠올랐을 때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자살’이었다며
생명체로 하여금 그 생명을 지속하도록 격려하고 이끌어가는 힘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묻는 글이었지요.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아동성폭행사건이
사람들에게 분노를 넘어 인간에 대한 슬픔을 자아내고 있음이
어디 그 글에서만이었을까요.
“가해자 역시 우리와 그다지 크게 다를 것 없는 생활인이었다.”
한 사건의 가해자만 어디 그러합디까.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이도
그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의미 있는 존재이지 않던가요.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여름 내내 쥐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건
인류사에서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데,
특히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PDA 같은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지요.
헌데 이렇게 더 자세하게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들이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두드러지게 키웠을까요?
아닙니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타인의 고통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리고 있음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니,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책은 역설하고 있었지요.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전쟁 이야기이고 그리고 인류의 잔혹사이고
그리고 바로 내 눈 앞에 지금 펼쳐진 우리들의 이 시대 이야기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