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11.나무날. 맑음 // 한 대학생의 자퇴서

조회 수 1111 추천 수 0 2010.03.23 23:47:00

2010. 3.11.나무날. 맑음 // 한 대학생의 자퇴서


눈 녹습니다,
와르르 녹습니다.
눈 그리 두텁게 내렸어도 봄은 봄입니다.

곳곳에 눈 피해들이 있지요.
마을 들머리 성길이 아저씨네 표고장도
한 동이 눈에 무너져 앉았습니다.
물꼬의 가마솥방에도 문제가 좀 생겼지요.
얼마 전엔 천장 한곳에서 비가 샜고,
어제는 바깥으로 뭉쳐있던 전기 전화선들이 주저앉았습니다.
식구들이 지붕에 올라갔지요.
봄 햇살에 지붕은 얼마나 다사로운지요.
한동안은 볕을 바래고 있었더랍니다.
천장이 샜던 원인은 무엇일까 살펴도 보고,
선들도 잘 갈무리를 해둡니다.

오후에는 메주를 씻었습니다.
정월 그믐에 장을 담지요.
낼모레가 그때, 마침 아이의 외할머니도 오셔서
작년처럼 장 담는 일을 진두지휘하실 겝니다.
메주를 잘 손질하여 바구니에 물기를 뺐고
낼 봄볕에 바짝 말려둘 것이지요.
참, 흙집 보수일을 다니던 종대샘이 걸음하여
식구가 또 늘었답니다.

어제 한 학생이 자퇴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입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고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그 여학생이 쓴 대자보를 읽었습니다.
'삶의 목적인 삶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그는 가고,
저는 남았습니다,
나를 뜨겁게 대학으로 불러주고 힘을 주는 수업이 있는 반면
정녕 계속 가야 하는가 좌절케 하는 수업 사이를 오가며.
적어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앎을 전달하는 것에는 전문가여야 하지 않나 하는 불만이 일어
피해갈 수 있다면 피해가고 싶은 수업을 때론 억지로 들으며,
절반 이상이 졸아도 화답하지 않아도
예정된 시간만을 꽉꽉 채워 홀로 하는 수업을 들으며,
결코 가르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 대로 배워버리는 게 습인지라
나도 학습자중심이지 못하는 그런 수업자로 익을까 봐 두려워하며,
시험에 대한 정보마저도 자신에게 줄 선 이들에게만 제공하는
최소한의 교수자 자질도 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버젓이 보고도 아무 말 못하며,
그런 수업을 걸러내는 제도가 없는 소속 대학의 제도를 개탄하는 속에도
그나마 시간을 들일 만큼의 가치가 있는 수업에서 받는 위로로 버티며
밥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는 삶터를 떠나
눈길을 뚫고 산을 나가 미끌거리는 길을 어제도 저는 달렸습니다.
그는 가고,
저는 남았습니다...
그의 글월 마지막 문장은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라고 써 있었지요.
저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의 그 구절 말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당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자. 다수의 힘이 무엇인가?
그들은 내게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나는 참다운 인간이 군중의 강요를 받아 이런 식으로 또는
저런 식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식의 삶이 대체 어떤 삶이겠는가?

; <시민의 불복종> 가운데서.

그 여학생의 글이 정녕 이 얼토당토않은 대학사회(결국 자본의 탑)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의 말마따나 균열은 금새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은 탑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겝니다.

아, 다만 아쉬운 한 가지,
뭐 할라고 누가 강한지 두고 본답니까.
그냥 뜻한 대로 살아가면 될 일이겠습니다.
이미 강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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