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11.흙날. 비

조회 수 1024 추천 수 0 2010.09.18 02:55:00

2010. 9.11.흙날. 비


밤새, 그리고 늦은 아침까지
비 역시나 ‘질겼’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고가지요.
오늘은 한 명상센터에서 다녀갔습니다.
가까운 곳의 스님과 함께 걸음한 이들은
곧 외국인 수행자들과 같이 머물 명상센터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야 그저 아이들의 학교, 어른들의 학교로서의
한 부분으로 명상을 채우고 있을 뿐이여
별 도움이 될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인사차 들렀다 했답니다.

어제 천장을 뜯어낸 가마솥방은
먼지 두툼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거기 잠겨있었을까요.
상량문이며 더그매를 그렇게 보여준 천장은
곧 이 시대에 걸맞는 재질로 바꿔졌습니다,
전기공사를 위해 일부 남겨둔 부분을 빼고는.
오늘은 내내 청소를 하며 보냈습니다.
달날께 전기공사가 들어올 테고,
그 다음으로 창문이 달릴 겝니다.

가마솥방을 공사를 위해 비워주고 난 뒤
달골에서 먹느냐 아래에서 먹느냐로 잠시 고민하다
얼떨결에 간장집 부엌으로 간이 부엌살림이 차려졌습니다.
작은 곳에 모여서들 밥을 먹고 있으니
알콩달콩 재미가 있었지요.
“여기서 먹길 잘했다.”
“꼭 집 같네.”
목수샘이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마솥방은
우리집이기보다 우리 공동체라고 불리기에 더 적절한 부엌이지요.
옛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2003년 들꽃샘들이 도와주어 가마솥방이 만들어지기 전
학교 행사에 쓰이던 부엌은 고래방 뒤란의 샌드위치판넬(?) 부엌이었고,
평소 살림을 살던 부엌은 간장집 부엌이었습니다.
예닐곱이 같이 먹고 지냈더랬지요.
어디서 다 무엇하며 살고들 있을까요...

애호박 하나가 아주 커다랗게 달렸더랬습니다.
작년에 그토록 많았던 호박이
올핸 몇 개 달질 못해 아쉽더니
보상이라도 하듯 여름 끝물에 실허게 열렸지요.
따다 호박국을 끓였습니다.
방학이면 북적이던 외가가 떠올랐지요.
외할머니의 사위들은 대개 교수이거나 교사여
우리 외사촌들은 방학이면 그곳에 죄 모여 긴 날을 함께 보냈습니다.
저녁이 내리는 마당 멍석 위에서
남도의 별미 갈치호박국, 그걸 먹었지요,
땀 뻘뻘 흘려가며 후후 불어가며.
곁에는 모깃불 오르고 말이지요.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어디에서도 그 음식을 보질 못했습니다.
어쩜 그리도 비릿내 하나 나지 않고 개운하던지요.
그렇게 호박국을 갈치는 없이 끓여보았습니다.
재료가 주는 향미가 어찌나 고숩던지요.
애고 어른이고 식구들이 아주 시원하게들 먹었답니다.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에서 특강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지난 8월 하순, 연 이틀을 남겨진 전화에 응답이 없자
손전화를 알아내서 연락을 해왔더랬지요.
거기서 몇 해째 하는 사순특강에서
훌륭한 강사들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던 바입니다.
지난해던가요, 네 사람이 하는 그 강의 가운데
하나쯤은 들었으면 싶기도 했더랍니다.
바로 그 특강을 말하는 거지요.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사순절이라면 3, 4월께가 아닌가요..
그러니까 내년 3월을 준비하고 있는 거였습니다.
아직 날 창창하니 어려울 것 없지 않겠는가,
가볍게, 하마 했고,
그리고 곧 강의요청 메일이 왔는데
오늘에야 열었지요.
지난해 한 지역의 전교조에서 형편없는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불러주신 분께 죄송했지요.
두고두고 후회가 일어 선뜻 안부 한번을 여쭙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강의요청만 들어오면 꼭 그 순간이 생각납니다.
잘 준비해서 잘 나누고 와야겠다 하지요.

아이랑 책 하나 같이 읽었습니다.
알렉스 쉬어러의 <13개월 13주 13일 보름달이 뜨는 밤에>.
이야기의 힘이 대단하였습니다.
밀고 가는 힘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아니나
두어 곳을 옮겨도 볼꺼나요.

"...너에게 꼭 경고해 주어야 할 일이야. 그건 바로 사악함의 방식이야. 사악함이나 죄악이 언제나 무시무시하고 추한 얼굴과 함께 오지는 않아. 때때로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사악하기도 해. 사악함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고, 또 무엇을 말하는가에 있는 게 아니야. 선과 악은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거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가야. 듣기 좋은 말과 약속과 예쁜 얼굴이 좋긴 하겠지만, 그 어떤 것도 어떤 일을 하느냐 만큼 중요하진 않아.
그리고 때때로 말이지. 가장 상냥한 웃음, 가장 달콤한 약속, 가장 예쁜 얼굴이 가장 사악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해. 그러니까 조심해, 칼리, 조심하라고.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를 늦추지 마..."

"시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거의 마법에 가깝다. 겨울을 봄으로 바꾸고 아기를 아이로 바꾸며, 씨앗을 꽃으로 바꾸고 올챙이를 개구리로, 애벌레를 고치로, 고치를 나방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삶을 죽음으로 바꾼다. 시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뒤로 돌아가는 것만 빼고. 그것이 시간이 가진 문제다. 오직 한 방향으로만 갈 수 있다. 시간은 물과 같아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과제나 바람이라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릴 수만 있다면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한다. 시간은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불러오고, 선물을 가져온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가끔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물론 힘든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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