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23.불날. 맑음

조회 수 999 추천 수 0 2010.12.12 02:17:00

2010.11.23.불날. 맑음


새벽비 아주 잠깐 다녀간 흔적 남은 아침입니다.
가마솥방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이 흘렀습니다.
러시아 겨울풍경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곡입니다.
아이랑 다른 나라를 떠돌아다니던 세 해,
모스크바의 옛시장에서
음반을 팔던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던 곡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자작나무로 만든 목걸이를 사서
오랫동안 그곳을 추억하며 하고 다녔더랬지요.
지금 생각하니,
뜻밖에도 그는 왜 그 곡을 여름 거리에서 들려주었던 걸까요?

수확한 마지막 마늘이지 싶습니다.
종자로 쓸 것을 빼고 마저 다 까서 찧고
얼려두려 쟁반에 납작하게 깔아 냉동실에 둡니다.
겨우내 요긴할 테지요.

은행을 계속 줍습니다.
류옥하다가 옆에서 쫄랑거리며 말합니다.
“은행이 고약한 냄새를 내는 건,
모든 씨앗들은 번식을 하기 위해 자라잖아요,
그런데 은행은 번식도를 높이기 위해서 동물들이 먹지 못하게
껍질에 고약한 냄새를 내도록 진화된 거래요.
그런데, 인간은 불이란 도구 덕분에 그걸 먹을 수 있게 된 거죠.”
그렇다네요.

“강아지 물통이 꽝꽝 얼어붙어 뜨거운 물 부어주어 겨울이라 여겼지만
옥샘에게는 가을인가 봅니다.”
아랫마을에서 온 문자였습니다.
좋은 가을아침이라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으로 시작하던 시와 노래를 떠올린다고
한 어르신께 안부 여쭈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더랍니다.
추위라면 생의 3대 공포라 말할 정도인데,
몸이 단단해졌나 봅니다.
반가울 일입니다.
멀리서 한의원을 하는 벗이 철마다 챙겨다주는 것들이
젤 먼저 떠오르며 고맙데요.

책 하나 들여다보다 반긴 구절 있어 옮겨봅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하고, 구성하고, 감탄하고, 감행할 자유를 얻는 일이다. 이런 자유는 각 개인이 노예나 기계의 톱니바퀴로서가 아니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 인간은 노예가 아닌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조건이 자동인형들의 존재를 조장하는 추세에 있다면, 그 결과는 삶의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사랑이다.”(에리히 프롬의 에서)

하늘을 다 채운 것 같은 커다란 달무리가 진 한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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