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25.나무날. 맑음

조회 수 1660 추천 수 0 2010.12.12 02:18:00

2010.11.25.나무날. 맑음


저녁, 기온이 푹 내려갑니다.

날은 어찌 이리도
늘 성큼성큼 발소리가 날만치 큰 폭으로 걸어가는지요.
발도르프스쿨의 오이리트미와 라이겐 시범수업을 하고
아주 녹초가 되어 돌아왔답니다.
그게 소품을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가야 해서
괜스레 고단한 노동을 하고 온 듯하지요.

발도르프 학교의 계절탁자를 재현한 책상에는
지구별을 상징하는 초록 천을 벽에 드리웠고,
바닥엔 짚을 깔았습니다.
그 위에 11월의 나무를 상징하는 큰 도자꽃병을 놓고
찻잔과 잔을 두었으며
방에서 뒹굴고 있는 전통적인 한국인상의 아이들 흙인형을 놓았지요.
(눈 코 입이 없는 일반적인 발도르프인형과는 달리
왜 그것을 놓았는가 이유를 함께 설명도 하였습니다.)
그 뒤로 방 환히 밝힌 촛불 있었지요.
빵을 구워내어 아침 간식을 먹는 발도르프 유치원처럼
빵을 내고 잼을 내고 그리고 아보카도를 잘라서 내며 시작했습니다.
아보카도,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열대과일(채소에 더 가깝나요)인데
은은한 색채를 강조하는 발도로프식 환경과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랬지요.
그리고 찬 11월에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며
해바라기 노래로 오이리트미를 하고
한해를 갈무리하는 씨앗의 일대기로 라이겐을 추었습니다.
그 중심엔 물든 낙엽들과 계절을 담아 샛노란 국화를 놓는 것도 잊이 않았습니다.
된서리를 맞고 한순간에 색을 잃은 나뭇잎들 탓에
색을 지닌 낙엽을 구하느라 산을 좀 헤매기도 했더랬네요.

오후, 아주 영향력이 큰
한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마이뉴스로 시작된 류옥하다의 이야기가
sbs의 ‘생방송투데이’를 거치며
몇 곳에서 취재요청이 이어지고 있었더랬지요.
한 해 한번 50분짜리 영상물 이상은 방송매체를 만나지 않는다,
이곳의 원칙(환상을 갖진 않게, 그러나 물꼬가 잊히지 않게)이라면 원칙인데,
그 방송은 분량도 더 많은 데다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없는 산골 우리들이 다 알만치.
야박할 만치 딱 자르게 되었지요.
그런데 마침 영동 가까이로 촬영을 다녀갈 일 있다며
한번 들리기라도 할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거야 무에 어려울 라나요.
그 프로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마침 낼이면 빈들모임도 있는 날이라 밥 한 끼 낸다 하였답니다.

오늘 젊은 학자 한 분께 글월 드릴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이란 게 그렇더군요,
다른 거 다 놔두고 단지 한 가지만으로도 우호적이 되기도 하고
아니 그렇기도 하고.
저는 그렇데요,
제가 아는 책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면
덥썩 아주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읽으셨죠?”
언젠가 그분이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을 언급하며 물으셨습니다.
“네, 삼신각 걸로 읽었지요.”
퍽이나 아끼는 책이랍니다.
많은 영감과 성찰을 주었던 책이지요.
그리 열심히 읽는 것도 아니면서,
더구나 산골 삶을 시작하며, 한편 나이 서른이 넘으며
이제는 활자로부터 멀어져 몸을 움직이며 살자 작정하고
책읽기에 오랫동안 소홀하였는데도
여전히 저는 책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나 봅니다.
그렇게 최근 책읽기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주신 분이셨지요.

날이 모질어졌습니다.
그러면 집을 떠나 있는 이들이 떠오르지요.
따숩게들 입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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