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9.흙날. 아침 눈 펑펑

조회 수 1293 추천 수 0 2011.02.05 01:24:32

 

 

“간밤에 차가 주행 중에...”

눈을 뜨자마자 차 수리점에 전화를 넣습니다.

간밤, 달리는 가운데 길 위에서 시동이 꺼졌지요.

연료필터를 갈아얄 것 같다고 미리 부품을 준비해 달라합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와서...”

내다보니 눈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설 연휴를 생각하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나가얄 듯합니다.

 

11시가 넘어서자 눈이 멎습니다.

차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읍내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서 다시 시동이 꺼집니다.

연료필터 위를 풀고 펌프질을 하려지만

긴급구조차량을 불러야하게 됐지요.

“사고현장을 가는 길인데...”

고개 저 편에서 이편으로 오는 참이었더랍니다.

일상의 기적이었던 게지요.

그렇게 읍내를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길 위에서 갑자기 차가 멈추었는데,

별다른 일 없이 지났고,

쉬 부품도 바꿀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읍내 차 수리점에서 택배도 받습니다.

마을까지 들어오지 못하겠다던 물건이지요.

이즈음의 택배들이 다 그렇습니다.

눈 때문이지요.

하기야 눈 아니어도 산골서 잦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면소재지 물건을 맡기라하고 오며 가며 찾아오기도 하지요.

성재네서 제주 한라봉과 우도 땅콩을 보내왔습니다.

이 귀한 걸 우리가 이 산골에 앉아 무슨 재주로 먹을 수 있단 말인가요.

고맙습니다.

 

해가 넘어가자 바람이 아주 드세집니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달골 오릅니다.

아이랑 준비한 영화 하나 봅니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안경>.

“딱 엄마 영화네...”

“그래?”

“별 일도 안 일어나고,

걷는 걸 오래 보여주고,

화면이 잘 안 변하고,

말도 많지 않고...”

그러면서 영화의 결말도 점칩니다.

“공항도 슈퍼마켓문이네. 딱 엄마 좋아하는 규모네.

끝까지 봐도 별일 없을 거야. 공항으로 여자가 다시 떠나는 게 끝일 걸.”

아이들의 직관은 뛰어납니다.

슈퍼마켓 같은 공항,

어쩌면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데요.

 

‘봄 바다가 진일토록 꾸벅꾸벅 조는’ 남쪽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너무 북적일까봐 아주 조그맣게 간판을 매단 민박집으로

(영화가 끝날 무렵엔 아하, 공동체라 부를 수 있겠구나 싶지요)

타에코가 휴가를 떠나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필요한 것만 넣었다는, 하지만 여전히 큰 그의 가방과 달리

해마다 이곳으로 봄이면 오는 사쿠라의 가방은 집 앞에 쇼핑 가듯한 가방입니다.

“여긴 관광할 만 한 곳이 없나요?”

손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을 찾아온 여자는

슬슬 구경을 나서려하지요.

그런데, 없답니다.

“그럼, 여기 놀러오는 사람들은 뭐 하러 오나요?”

‘젖어들려’고 온다네요.

타소가레, ‘사색’을 말합니다.

그 말의 어원이 황혼, 해질녘이라 하니 사색이란 낱말이 더 깊이 이해되듯

젖어들다로 듣고 나니 울림이 커집니다.

 

그러나 젖어들기가 어려운 타에코는 민박집을 옮기려하지요.

그들이 따라가는 지도에는 이리 적혀 있습니다.

“잘 몰랐다 슬슬 불안해져도 참고 2분만 달리다가 그때 오른쪽입니다.”

“슬슬 불안해질 때부터 80미터 가서 오른쪽입니다.”

그런데, 그 2분과 80미터가 좀 걸립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허술함은 바로 이런 부분에 있을지도...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내뱉고를 다섯 번 하며 달리다 오른쪽, 이라거나

음... 하고 깊은 한숨을 네 차례 하고서 오른쪽이라는 것은 어떨까요?

 

새 민박집 주인은 타에코에서 호미를 들립니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오전 중엔 밭일을 하고요, 오후엔 공부를 합니다.

여기선 협력해서 일하며 서로 믿음을 다져요.

흙에서 자연의 은혜를 느끼고 삶의 참의미를 얻는 거죠

태양과 우주만물에 경의를 표하며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언뜻 이게 무슨 상황이야 싶다가

그제야 감독의 조소 혹은 야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맞아요, 아까 그 민박집이 감독이 그린 공동체이상형쯤 되었던가 보지요.

느리게 또는 조화롭게라고 깃발을 내건 대부분의 생태공동체,

한때 물꼬가 시도하기도 했던,

그것의 부자유스러움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거기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에코는 그곳을 떠나 다시 앞서의 민박집으로 옵니다.

비로소 가방도 버리게 되지요.

 

비법이 서두르지 않는 거라는(너무 상투적이어 감동이 덜했지만 이해가 되는),

온 마을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쿠라의 팥빙수를 마에코도 드디어 사먹어 봅니다.

아무 장식이 없는 목조 가게에서

팥에 얼음을 갈고 설탕시럽만 올린 팥빙수 값으로

누구는 자기가 기른 야채 한 바구니, 아이는 종이접기한 무엇을 내밀고,

어느 누구는 만돌린을 연주하고,

마에코도 공기도 함께 뜨는 거라던 뜨개질감을 내놓지요.

그런데, 그곳에 모인 이들이 어찌하여 그곳에 이르렀는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과거는 없습니다.

영화에서의 대사처럼 그걸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래서! 더욱 좋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지만,

그 과거를 어쩐단 말인가요.

지금부터 시작!

그러면 될 겝니다.

 

바닷가에서 누군가 읽는 독일어 시가 반짝입니다.

(그런데 원래 일본시를 독일어로 번역한 거라더군요)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길을 따라 똑바로 걸어라

     심연의 바다를 멀리한 채

     그대의 말들은 뒤로 남긴다

     달빛은 온 거리를 비추고

     어둠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보석처럼 빛난다

     어쩌다 인간이라 불리어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

     무얼 두려워하는가

     무얼 겁내는가

     이제 어깨를 두르는 짐을 벗어버린 시간

     나에게 용기를 다오

     너그러워질 수 있는 용기를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나는 자유를 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도 좋습니다.

 

     헤매지 않고

     새는 바다를 건넌다

     따뜻한 달빛은 사랑을 비춘다

     그리하여 계절은 익어가고

     이곳에 서서 바람을 쐰다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내가 이곳에 와 있다

     Man lives freely only by his readiness to die

     슬픔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나는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그것은 단 한 가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자

     대지도 사람도 사랑스럽다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내가 이곳에 와 있다.

     Man lives freely only by his readiness to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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