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아저씨와 아이가 본관 옥상지붕에 오릅니다.
해우소 지붕도 살피지요.
홈통 머리에 어느새 또 날아들어 쌓인 낙엽을 치우고,
눈 쌓여 언 얼음을 깹니다,
녹아서 폭우처럼 흙집 천장으로 내리기 전에.
한발 앞서면 더 큰 수고를 줄일 수 있습니다.
올해는 밭의 풀도 그리 잡을 수 있으려나요.
10년 넘어 된 특수교사의 상담전화를 받습니다.
반에 대책 없는 6학년 아이를 어쩔거나,
부모도 교사도 도대체 어찌할 수 없어 전화를 해왔습니다.
아이의 말을 듣노라면
그로서는 자기 행동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일반화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개학을 했고, 학교를 간다고 나갔으면, 학교로 와야죠.”
노는 걸 너무 좋아하는 그 아이, 노느라 학교를 빠졌답니다.
자기는 방학 때 집에만 갇혀있었기 때문에 놀아야했다는 거지요.
저라고 별 수가 있겠는지요.
열심히 이야기를 듣는 게 최선이었고,
해결법을 어떻게 찾을까보다
그 처지들을 헤아려보려 애쓰며 들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낼모레면 졸업을 하는 그 아이에게
이제 더는 담당자가 아닌 그 교사가 그럴 수없이 고마웠습니다,
끝까지 아이에게 뭔가를 할 수 있지 않겠냐 찾는.
그런 분들이 선생님이신 거지요.
목공실에 가서 한참을 있었습니다,
말이 목공실이지 그저 비닐하우스에 몇 가지 연장과
그 연장보다 몇 배는 좋히 되는 자잘하고 꼬질한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한.
사실 일 년 내내 그곳을 들여다보기는 댓 차례도 아니 될 것인데,
새삼스레 자주 들락거리고 있는 것은
목공(이라기 보다 그저 집안 잔손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여)에 대한
바램 때문이지요,
슬슬 키워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떤 게 있나 살피고, 같은 것들끼리 모아놓기도 하고,
이름조차, 쓰임조차 모르는 것들 눈여겨 봐두기라도 하였지요.
사람들의 축하전화를 종일 받았습니다,
뒤늦게 공부 하나 잘 끝냈다고.
꽃다발을 보내준 벗도 있었지요.
기억하고 연락한 이들도 고맙고,
4년을 곁에서 도와준 식구들도 고맙고,
같이 공부한 젊은 친구들도 고마웠습니다.
여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어 그 무엇보다 뿌듯했습니다.
우리 삶에는 늘 그렇게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고마울 일입니다.
강원도 깊은 골에서도 전화 하나 들어왔습니다.
나이 마흔에 절집 식구가 된 이입니다.
그렇게 다섯 해가 흘렀네요.
속세에 살 적 사고 투성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한때 물꼬 공동체식구로 잠시 적을 두기도 하였지요.
설이군요, 연초입니다.
이 골짝을 잊지 않고 새해인사 건네왔습니다.
어찌 어찌들 다 세상을 건너가네요.
한 세상이 그리 흘러갑니다려...
그 말 많던 심형래의 <D-war>를 보았습니다,
아이가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덕에.
“그렇게 형편없지 않던데...”
디워 논쟁이 한창일 때 자기는 나름 재밌었다 아이가 평했더랬지요.
애국주의에 호소한 상업적 전략에 눈살을 찌푸렸다고들 했지만
(하기야 마지막 장면의 아리랑과 자막은 확실히 신파였지요),
아니, 그럼, 돈을 버는 다른 것들은 어디 그렇지 않은가요.
별말을 다 한다 싶지요.
도대체 상업영화에 뭘 기대했느냐 말입니다.
그건 어쩌면 감독의 재주일지도 모릅니다,
수준 있는 영화의 감독으로서는 이름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정작 디빠라 일컬어지는 옹호론자 내지는 지지자들이
정말 밥 맛 없어한 건 잘난 평론가들이었던 건 아닐지요.
다양성, 혹은 개인의 취향을 무시한 것에 대한 분노 같은 것.
혹평에 지레 기대치를 아주 낮춰서 그런지
저는 생각보다 볼만했습니다, 꽤나.
한편, 영화란 게
한 장면만으로도 얼마든지 망쳐질 수 있다는 걸 경험하기도 했지요.
신인배우들의 연기가, 으윽...
평론가들한테 저 역시 화가 좀 나기도 하데요,
지독하게 했다는 혹평에 대해.
뭐라고들 평했나 찾아볼까 하다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면서까지 옹호를 하고픈 영화까지는 또 아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