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10.불날. 비 주섬주섬

조회 수 1178 추천 수 0 2011.05.23 16:43:35

 

 

새벽, 둥둥 떠내려갈 것 같은 밤이었습니다.

더럭 무서웠습니다.

아이들이 있으니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습니다.

혹여 저것들이 아플까, 다칠까,

무슨 재해라도 날까 노심초사이지요.

내리꽂히는 억수비였더랍니다.

 

아침밥을 준비한 모둠,

그간 자주 문제를 좀 드러냈던 모둠입니다.

타인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언제나 억지로 끌려가는 소 같은 분위기 말입니다.

드디어 희진샘이 보다 못해 그들을 세우고 나머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이 표정과 자세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고.

아이들을 서로 상반된 자리(마치 대적하게 하는)에 있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한번쯤은 문제제기가 나왔어야 했을 일이지요.

밥하는 게 이토록 즐겁지 않은 일인가,

어떡했으면 좋겠는가 결국 회의에서 다뤄보기로 합니다.

좋은 회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가죽나물과 더덕순을 데쳐 먹었습니다.

뿌리는 뿌리대로 잎은 잎대로,

순은 순대로 열매는 열매 대로

이미 자연이 주고 있는 먹을거리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걸 다 못다먹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계절이 갑니다.

참 건강한 먹을거리들이지요, 말해 뭣하려나요.

가죽나물은 김치를 담았습니다,

양으로야 보시기 한 사발이라 할 양이었지만.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자전거 타고 물한계곡의 황룡사로 절밥 먹으러 갑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들고 온 평화와 사랑, 자비의 메시지 때문이지요.

그래서 종교를 초월한 모두의 축제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회가 끝나고 앞치마 입고 장화신고 공양간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을 걷어먹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요.

그런데, 여러 어르신들이 물꼬를 잘 압니다.

심지어 제 이름을 들먹이는 분도 계셨습니다.

오래 물꼬가 예서 살았고나 싶데요.

밥도 밥이지만

덕분에 떳떳하게 과일도 배터지게 멕였습니다.

어른들이 나물을 싸주기도 하셨지요, 먹는 입 많다며.

 

미국인 친구가 오후 버스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의 영어공부 시간을 위해서인 셈이지요,

정해놓은 공부 시간은 아니나.

아이들을 앞세우고 마을 산책도 다녀오고

책방에서 오래 이야기도 나눕니다.

외국인이 낯설지도 않은 아이들이려니, 그것도 서울서 온 아이들이라 했는데,

웬걸요, 쑥스러워하고 그래서 말도 못 부치고 그랬지요.

우스웠습니다.

밤, 아이들이 달골 오르고,

밤을 밝힌 등불을 보러 다시 외국인 친구와 함께 갔습니다.

내리는 비와 어둠에 절은 일찌감치 푹 잠겼는데,

스님이 불을 밝혀주셨네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절 곁의 계곡의 물은 큰 비에 불어

우리는 마치 물속에 떠내려가는 연꽃 속에 앉았는 듯하였답니다.

 

준이가 한주 만에 베트남에서, 다시 서울에서, 돌아왔습니다.

남자 아이들이 방에서 늦도록 속닥이고 있었지요.

뭔가 감추는 게 있습니다.

그냥 가벼운 준이 귀환 파티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슨 사건일까,

느낌을 잡아보려 애썼습니다.

썩 유쾌한 움직임은 아닌 듯하였습니다.

아무쪼록 나쁜 일이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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