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31.물날. 맑음

조회 수 1039 추천 수 0 2011.09.10 01:06:23

 

 

밭이라기보다 밭뙈기란 말이 더 어울리는

학교 옆 실습지들,

소사아저씨는 늦더위에 쉬엄쉬엄

고구마밭 무밭 고추밭 들을 돌아보셨더랍니다.

 

손발 보태러온 경주 외곽에서 사흘째.

계획은 바뀌어 굳이 손발 보태지 않아도 되는 상황 되었고,

덕분에 장애아동 재활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대 밖의 성과입니다.

자폐범주성아동과 지적장애아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말에 오를 수 있는가,

말에 오른다는 것이 이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를 봅니다.

장애아들이 말에 올라 어디로 갈지 방향을 결정하고

그리고 말을 그 방향으로 몹니다.

오후 내내 지켜보았지요.

 

2시에 깬 잠으로 내리 깨어

이른 아침 들로 나갔습니다.

집이 으레 남향이겠거니 했는데, 서향인 것도 그제야 알았지요.

집 뒤, 그러니까 북이라 생각한 곳이 동쪽이었습니다.

산골 물꼬서 맞는 아침 해는

산 너머로 쏘옥 하고 올라오는 해인데,

여기서는 먼 곳 하늘부터 달아오르기 한참이더니,

붉은 기운 스러질 무렵 어느새 해가 올라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어기가 동해이겠군요.

 

역에 나가 벗을 보고 옵니다.

실천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의 화제였지요.

머리로만 움직이는 삶에 대한 경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득차서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움직이는 데는 아직 시동이 걸리지 않는 그입니다.

“움직이면서 생각할 것, 하면서 힘을 낼 것!”

나이든 벗은 언젠가 하리라던 꿈을 위해

최근 먹고 사는 일에 온통 투자하던 자신의 일을 접었는데,

여전히 먹고 사는 일에 불안해합니다.

헌데, 사람이 사는 데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하던가요.

이 풍요의 시대에 먹고 사는 걸 걱정하다니요.

타인들의 소비와 발을 맞추자니 힘이 든 것일 뿐입니다.

힘껏 그를 북돋우지요.

“옛날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난 사람이 있었어요.

마침내 스승을 만나 진리의 본성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그저 밥을 먹었느냐 물었지요.

안 먹었다 하니 스승은 밥을 주었겠지요.”

밥을 다 먹은 그가 또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진리의 본성은 정녕 무엇입니까?”

“밥은 다 먹었느냐?”

“네, 그런데 진실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스승은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배고 고프면 밥을 먹어라.

그리고 다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라.”

나날의 일상을 헤쳐 가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본성일지니...

 

아이가 읽고 있던 마르티나 빌드너의 책을 들여다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마침 벗이랑 나누고 왔던 이야기의 연장이겠습니다.

 

벗을 보느라 경주 시내에 있은 밤,

홀로 낯선 곳에서 먼저 잠에 들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더랬습니다.

“토끼가 죽었는데...”

“형을 도와줬어야지.”

“엄마, 끝까지 들어!”

하하하, 그렇지요, 끝까지 들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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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31.물날. 완전 더움 / <솜사탕, 어이없게 죽다>

 

여기에 우리에 갇히지 않은 토끼가 한 마리 있다. 아주 온몸이 하얗고 귀여워서 이름이 ‘솜 사 탕’이다.

오늘 저녁, 그러니까 2011년 8월 31일 물날 저녁 10시경에 참사가 일어났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방에서 노트북을 켜고 친구들과 카페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형아가 “하다야, 불 좀 비춰줄래?”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끔찍한 일이야.”라고 답했다. 역시 끔찍한 일이였다. 길가에 솜사탕이 내장을 다 드러낸 채 누워있는 것이였다. 형은 그 시체를 비닐봉투에 담아다가 퇴비장으로 갔다. 그리구는 나하고 무덤을 팠다.

저녁인데다가 내장이 나와 있는 사체 생각을 하니 끔찍하고 무서웠다. 흐느적거리는 내장... 피부성이 살... 그래도 내가 무덤을 만들어주고, 묘비도 세워주었다. 내 생각에는 편한데 갔을 것 같다.

토끼, 그 짧은 인생을 더 짧게 살다갔다.

 

(열네 살 류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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