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8.나무날. 빗방울 잠시

조회 수 1178 추천 수 0 2011.09.18 20:53:27

 

설과 한가위, 두 큰 명절을 늘 대해리에서 쇱니다.

이곳에서 쇠는 이들이 찾아들기 수년,

집을 갈 수 없거나 가지 못한 이들,

혹은 마음을 풀고픈 이들이거나 그저 쉬어가려는 이들,

그리고 안부인사를 오는 이들이지요.

그런데 올 한가위엔 마침 움직일 일이 생겼습니다.

길이 어떨지 몰라 아무래도 차를 좀 점검해야겠다 싶었지요.

정비소를 향해 가는데, 5킬로미터나 남았을까요,

갑자기 파워 스티어링 휠이 뻑뻑합니다.

겁이 더럭 날만치 돌리질 못하겠는 거지요.

처음 1종 면허를 위해 운전을 배우던 때는

조향핸들에 그런 도움 없이도 운전을 했더랬는데,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는 일에 너무 익어진지 20년도 더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오일이 바닥인가보다 하고 정비소에 닿자마자 얘길 하니

수리공이 오일부터 채웠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오일, 바닥으로 다 샙니다.

호스가 찢어졌던 거지요.

뭐, 이런 것도 물꼬의 기적이라 부르겠습니다.

마침 짬 내서 거기 일보러 가는 길에 그러했으니 말이지요.

산골 사니 이런 일 하나만 이곳서 벌어져도

맘 내고 시간 내고 다 일, 일인데

부러 시간 내지 않아도 되어 하는 말이랍니다.

 

이곳에서 한가위를 같이 쇠려했던 미국인과 일본인 친구를 만나

점심을 같이 하는 걸로 안부를 대신합니다.

이국에 와서 지내면 그런 휴일이 퍽도 허전하지요.

사람들이 쓸쓸하지 않은 명절이길.

 

마침 나간 길에 도서관에 들러

숲 관련 몇 가지 연구서와 이론서 그리고 에세이를 몇 챙겨 들추는데,

눈에 든 책 하나 있었습니다;

한 시인이 쓴 울타리에 관한 명상.

해마다 시인의 어머니는 호박이 덩굴손을 뻗고 노란 꽃잎을 비죽이 내밀기 시작하면

언제나 노란꽃을 매단 덩굴을 울타리 밖으로 적당히 갈라 놓으셨다 합니다,

호박은 울타리 안팎으로 적당히 달려야 잘 된다,

이러면 호박꽃이 보기에도 더 좋다시며.

애호박이 주렁주렁 달린 어느 날,

봉당을 가로질러 똥을 누러 두엄자리로 가던 어린 시인은

휘부움하게 밝아오는 울타리 너머로 걸인이나 다름없는 낄룩어멈이

애호박 몇 개를 따서 치마폭에 감춰 사라지는 걸 목격합니다.

동네 허드렛일을 도와 밥을 얻는 그 어멈은

농번기엔 날품으로 남편 폐병 수발을 했다는데,

하여 사람들은 일거리 주는 것조차 꺼림칙하게들 여겼다지요.

어멈 말고도 울타리 주위를 기웃거리는 이웃들이 꽤 있어

울타리 밑의 비름나물이나 돌미나리 등을 뜯어가기도 했다 합니다.

돌이켜보면 호박 몇 개쯤 따다 건네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 아니었을 것이나

그만큼 그네들의 자존심을 덜어 와야 했던 점을 염려하신 어머니셨던 게지요.

그런 마음이 시인을 키웠겠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미 마음이 어떠해야할지를,

무엇이 정녕 아이를 키워내는지를 생각게 한 대목이었습니다.

 

밤, 한 PD님의 연락이 또 있었습니다.

국내 가장 높은 시청률을 확보하고 있는 오래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아홉 연출가 가운데 한 명이지요.

줄기차게 그곳으로부터 연락이 있어왔습니다,

이제는 아주 가까운 지기가 된 듯하기까지 한.

“꽃 피는 봄이 오면...”

또 그리 전합니다.

영향력이 너무 커서 경계했던 프로그램,

새 봄이 오면 그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요?

살아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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