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21.물날. 맑음

조회 수 1221 추천 수 0 2011.10.04 16:13:40
 


호두따기 여러 날입니다.

오늘은 학교 뒤란 언덕 아래 식구들이 호두를 텁니다.

옥상을 오르내리며 연일 고추도 말리고 있지요.

이웃에서 무를 솎아 보내왔습니다.

열무 같았지요.

마침 다가오는 빈들모임도 있어

김치 담으면 참 좋겠다 합니다.

오늘은 장독대를 돌봅니다.

날마다 닦던 할머니를 보고 자랐고 어머니도 보았지만

여러 주에 겨우 한 차례나 닦고 있나요.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런 줄 알아도 못하는 일이 어디 한둘이려나요.

그런데, 에미 허리 숙이면 아프다고

아이가 달려와 열심히 항아리를 닦습니다.

고마운 아이입니다.

그러다 아이 왈,

“아프면 좋겠다...”

죽 먹고 싶어서랍니다.

“응? 해 달라 그러지. 먹자.”

“아니, 아플 때 먹어야 해요. 그때가 맛있어.”

그래요, 그 정황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맛이 나요,

마치 물꼬 김치김밥이 산 위에서 먹어야 하듯,

초코파이를 산오름 날 정상에서 먹어야 하듯.


한의사 벗의 연락입니다.

그가 멀리서 보내왔던 한약을 어느새 다 먹었더랬지요.

맞고 다니는 침도 침이지만 마음 쓴 그의 약이 치료에 큰 몫 했을 겝니다.

“지난 번 보내드린 약 다 드셨겠다 싶어 다음 약을 보내려고...”

요새 자주 연락하는 벗 하나도 신발을 보내왔습니다.

허리와 다리가 아픈 거면 아무래도 발이 편해야지 않겠냐고.

마침 쌀쌀하기도 한 날이어

아예 실내화처럼 건물 안에서 지금 신고 있습니다.

스스로 몸을 돌보는 것에도 게으르지 않은 데다

여러 사람이 마음을 써주고 있어 잘 추스르리라 한답니다.


김경주의 시 ‘몽상가’의 한 구절이 눈에 듭니다.

 


                  몽상가

-날아가는 새가 사람의 머리카락을 물고 가면

  그 사람은 밤에 날아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연두색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

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

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

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

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은 자로서 나는 사

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

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로 시작되는 연기가 연두색 담배의 끝물에서 흘러나온다


* 중국 고전 <박물지>의 한 구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불가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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