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 7.쇠날. 맑음

조회 수 1154 추천 수 0 2011.10.16 02:19:10

 

 

 

날 참말 좋습니다.

비가 온 뒤라 더할 테지요.

가장 많은 불평을 듣는 것도 날씨이지만

가장 많은 찬사를 듣는 것 역시 날씨다 싶습니다,

낯선 이에게 말을 붙이게도 하고

서먹한 이에게 화해할 계기이기도 하고

떠나게도 하고

은둔자를 불러내기도 하는.

 

오늘은 식구들이 모두 달골 창고동에 모여 대배 백배를 하였습니다,

옴, 아, 훔, 진언과 함께.

수행이란 각자 자신이 짊어지고 다니던 짐 꾸러미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이라고도 한다던가요.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자기가 짊어지고 다녔던 짐들 가운데 대부분의 것들이

더는 필요치 않다는 걸 깨우칠 겝니다.

 

“호두랑 은행 따러 올게요.”

그저 인사로 하는 그런 말들이기 쉬울 것을

소사아저씨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목을 빼고 기다리십니다.

요전에도 그리 이르고 떠났던 한 젊은이를

어찌나 자주 들먹이시던지...

사람들이 그런 말 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전엔 달골 포도밭 아래 있는 호두나무를 털었습니다.

지난 달 빈들모임에서 이미 한 차례 땄던 나무입니다.

그런데 단단한 상민샘이 장대를 들고 높다란 가지를 올라 후려쳐

무려 한 포대를 채웠지요.

 

“샘 왔을 때 해야 할 일들 다 챙겨해야지!”

젊은 사람이 필요한 일들이 참으로 많은 산골살이입니다.

상민샘 온 참에 난로도 설치하자 합니다.

서둘러 읍내를 나가서 연통을 사옵니다.

나간 길에 얼마전 교문 현판을 걸어준 박시영샘네도 들러

사과잼을 전하고 왔지요.

그런데 화덕 하나가 시원찮아

가마솥방과 책방을 우선 챙기고 교무실은 나중에 놓기로 합니다.

상민샘의 야무진 손끝은 류옥하다 선수를 감탄케 했습니다.

온 사람들이 보태는 손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아이인데,

정말 일을 깔끔하게도 하는 상민샘이었지요.

 

저녁엔 대전의 무겸네와 청주의 승훈네랑 통화를 합니다.

아이들 다녀가고 여러 곳에 전화 주지 못했습니다.

“계자 끝나자마자 개학이었고, 또 추석연휴가 이어져서...”

외려 여기 사정을 살펴주시는 부모님들이었지요.

고맙습니다.

 

아홉시도 한참을 넘어 교무실을 나설 참인데,

소사아저씨 막 달려왔습니다.

“낳았어요, 새끼 낳았어!”

드디어 장순이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노산도 퍽도 노산입니다.

단도리를 좀 해두고들 들어갔지요.

 

미국인 친구 일로 통화가 잦았던 하루였습니다.

손전화를 신청하러 가서 직원과 다투고,

열쇠를 잃고 수리공을 부르고,

그 과정에서 관련된 사람들과 전화 수차례 이어지고,

그럭저럭 수습을 해주었습니다.

그에겐 얼마나 난감한 날이었을까요.

다른 나라를 떠돌아다녔던 시간 제게 그렇게 힘이 돼준 사람들이 있었고,

이제 이 나라에게 외국인들에게 그 빚을 갚습니다.

서로 그렇게 주고받으며 사는 우리 삶일 테지요.

 

아, 긴긴 하루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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