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8.불날. 가을볕이 참 곱다

조회 수 1258 추천 수 0 2011.10.30 09:37:08

 

온통 서리로 얼어붙은 산골의 아침이

도툼한 가을볕으로 걷혔습니다.

식구들이 콩을 수확했습니다.

소출이 제법입니다.

올해는 우리 콩만으로 메주를 쑤겠습디다.

 

“대배와 선정호흡, 하니까 정말 좋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까지 끌고 나와 해건지기에서 대배를 하며

식구들에게 그리 말하고 있으니 아이 왈,

“엄마는 아침수행으로 요가 할 땐 요가가, 국선도 할 때는 국선도가,

또 그 뭐더라, 아, 태극권, 태극권 할 땐 또 태극권이,

절명상 할 땐 절명상이 젤 좋다더니, 이제 대배가 젤 좋대네.”

그러게요, 늘 지금 만나고 있는 게 가장 좋으네요,

사람도 그렇더니...

 

여유로이 출근.

담임이 부재하는 초등학교 통합학급으로 한주 지원을 가기로 했습니다.

본관 들어서며 신발장 앞에서 교장샘과 마주쳐 인사드린 셈 되었네요.

보조샘들과 문 활짝 열고 청소 한판.

“옥샘, 사랑해요!”

한 녀석의 끊임없는 ‘사랑해’와,

“옥샘, 멋있어요!”

다른 녀석의 ‘멋있어요’, 그리고

“옥샘, 예뻐요!”

또 다른 녀석의 ‘예뻐요’,

한 시간에 열두 번도 더 소리치는 이 아이들과 한주가 끝난 뒤엔

정말이지 예뻐져 있겠습니다.

이런 아이들과 수업을 할 것이지요.

이들과 맺은 인연이 벌써 3년입니다.

재작년 한 학기동안 주마다 하루를 이 학급에서 보냈고,

작년에는 한 달 내내 출퇴근하며 보냈지요.

그리고 이 한주.

그 사이 졸업을 두 학년이 해 나갔고,

4학년은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원적학급으로 가는 아이들 거르지 않고 올려 보내고,

통합학급으로 오는 아이들 수업 챙기고...

한 번에 아홉 전원이 다 오는 때는 드뭅니다.

그렇더라도 제각기 진도가 다른 아이들이 댓 명 둘러앉아 있으면

불러대는 소리가 쉽지는 않지요, 오래 아이들을 만나왔어도.

하지만 보조샘은 보조샘의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써야하는 게 맞을 테지요.

네 자리수 더하기를 배우던 한 녀석,

“자리가 네 자리더라도 실제 세로 한 줄을 뜯어보면 한 자리수인 셈”이라는 말에

“어, 그렇네.”

뭔가 깨우쳤다는 표정,

이런 즐거움이 교사들의 보람일 겝니다.

 

한 아이의 얼굴에 든 멍이 안쓰럽습니다.

중학생인 그의 누이는 그예 학교를 그만두었다 합니다.

예전에도 만만한 동생을 툭하면 때려

얼굴에 긁힌 자국 혹은 멍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이혼한 아버지가 집 곁에 살긴 하나

할머니 밑에서 누나랑 삽니다.

한편, 자폐아 한 아이는

여전히 깔끔한 외모에 옷도 그러합니다.

다른 아이들이 원적학급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 것에 반해

이 아이는 학급 아이들이 잘 챙긴다 합니다.

적지 않은 자폐범주성 아이들이 그러하듯 지적능력이 뛰어난 것도

한 까닭일 수 있을 겝니다,

능력 앞에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물론 엄마의 지극정성도 한몫합니다, 친구들을 관리해주는.

장애아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도

이렇게 그 아이의 생김, 옷차림, 그리고 부모의 바라지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삽니다,

하기야 꼭 이 시대만 그러할까만.

버르장머리 없고,

누구 표현대로 ‘어디 가서 잘 먹은 것도 자랑해야하는’ 그런 천박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담임샘이 하던 수업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진도에 충실하게 따른 하루였습니다.

그저 가을날의 한주를 잘 흘렀다 가지 합니다.

그러다 그 사이 사이 뭔가에 번쩍이면 또 그걸 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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