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27.나무날. 맑음

조회 수 1140 추천 수 0 2011.11.09 01:38:38

 

 

남도 한 도시의 외곽에 있는 교육센터에 출장.

뭐 당연히 머니 다른 일과 엮어서 가지요.

면소재지에 하나 있는 모텔에 묵고 일어난 아침.

침대가 방을 다 차지한,

그래서 겨우 요가매트 깔 정도의 폭만 남은.

그래도 아침수행을 합니다.

같이 온 아이는 공간이 없어 이불 속에 더 뒹굽니다.

좋겠습니다(?).

기본호흡, 대배 백배, 선정호흡.

 

그런데, 차에 두고 온 장갑.

으윽! 날 찬데...

마침 눈에 간밤에 빨아서 바닥에 널어둔 양말이 보입니다.

말랐습니다.

끼고 합니다.

그래도 되나...

된다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인도 있을 때였는데요,

하녀로 일하던 인도 아이가

(아, 이게 말이지요, 집안일 잠깐 도와주는 여자 아이로

워낙 루삐가 싸니 더러 그런 이가 집에 있습니다요)

걸레로 식탁을 닦고 있어 깜짝 놀랐는데,

그의 말, 상을 닦으면 행주이고, 바닥을 닦으면 걸레 아니냐고.

오늘 양말은 수행을 위한 장갑이었더랍니다요.

 

영동으로 돌아오는 길,

수건으로 칭칭 동여맨 단호박죽을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두어해 전 연을 맺었고 지난 여름부터 자주 뵙는

좋은 이웃이고 선생님인 정미샘이 싸준 것입니다.

점심 초대를 번거로울 듯하여 거절하였더니

요즘 속이 좀 부대끼고 있는 절 위해 준비해주신 것이었지요.

감동이었습니다.

아, 내가 무엇 한 것이 있어, 내가 다 무엇이어 이런 걸 다 받는가,

엎드리게 되는 거지요.

사부님한테서는 동물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사모님한테서는 사람을 어찌 만나는가를 배운다지요.

 

돌아와 한파를 견디기에 허술한 곳들을 살피며

어디 먼저 겨울 준비를 하나 차례를 정합니다.

“집을 어찌 관리해요?”

“그러니 작아야 해요!”

언젠가 수도 일을 업으로 하는 이에게 물었던 적 있었습니다.

그래요, 겨울은 모여서 살고 여름은 흩어져서 사는 게 최선이지요.

그런데 예 살림은 어째 그것조차 여의치가 않습니다.

집이 크니 겨울 나는 일이 참 전쟁입니다.

벌써부터 해도 추위에 밀리듯 하게 됩니다.

그래도 겨울은 오고 우리는 겨울을 건너가 봄을 맞을 테지요.

낡았으나 낡지 않은 말들이다 싶습니다.

 

밤, 잠시 짬을 내

반을 잘라 보고 다른 날 또 남은 걸 보기로 하며

아이랑 오래된 흑백영화 한편 열었습니다;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

“어, 나 아는데! 샹그릴라. 똑같네, 책이랑. 우리 책방에도 있는데...”

무릉도원이고 유토피아인 곳.

오늘날 중국은 그곳이 여기라며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소식이지요.

더러 샹그릴라를 찾아 떠나기도 하고

있는 곳에서 건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하나

결국은 별 곳이 없더라고 끝나는 이야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들어왔지요.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맘 편함, 그것이란 걸 알게 되잖던가 말입니다.

네? 아아, 네, 물론 저마다 다를 수야 있다마다요.

뭐 제가 그렇더란 말입니다, 맘 편한 게 천국입디다려, 지금처럼.

평안하시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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