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 5.달날. 맑음, 아침기온 뚝

조회 수 1176 추천 수 0 2011.12.16 15:12:04

 

이곳저곳 물이 잘 빠져야 겨울 밭농사도, 학교 여러 곳 살림도 편합니다.

소사아저씨의 요즘 대부분의 일은 배수로 청소들입니다,

장마 오기 전 그러하듯 눈 내리기 전 말이지요.

 

오후에는 아이랑 배추도 뽑습니다.

김장하기 이삼일 전에 뽑으면 맛나다지요.

다른 댁들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해마다 알이 더 굵어지고 속이 찹니다.

뒤란 창고도 같이 있는 아이들뒷간 쪽으로 배추를 쌓습니다.

“천막을 덮어두면 안 얼어요.”

소사아저씨 가늠으로야 그러하지만

언제고 칠 비닐인데 이참에 하면 좋겠지요.

아이가 서두르자 소사아저씨도 거들어 비닐이 쳐졌습니다.

겨울 일 하나 그리 또 해치워버렸네요.

 

오전 서울서 내려오던 길,

실내슬리퍼들을 잔뜩 맡긴 역전 구두수선방에 들렀습니다.

구두병원이라 써 있기 병원장님이라 그 주인 박노기님을 그리 부릅니다.

“이것도 좀 붙여주셔요.”

망가진 시계 줄도 부탁하지요.

본드를 칠해 하시던 일을 마저 할 동안 기다리며,

역 앞 택시아저씨며 오가는 이들에게 들은 물꼬 이야기를

제법 소상히 꺼내시는 걸 들었습니다.

산골에서 살아가느라 애쓴다셨지요.

일이 다 되고 맡겼던 우리 보따리를 꺼내시는데

고치기에 도저히 적합지 않은 몇 짝은 버리기도 하셨답니다.

그런데, 수선비를 받지 않겠다며 그냥 가라셨습니다.

“네에? 아니요...”

웬만하면 버리기 마련인 실내슬리퍼를 끌고 와 맡긴 게

측은하기라도 하셨을라나요.

손으로 애쓴 일을 그리하면 아니 되지요.

“내가 무슨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따로 든 것도 아니고 내 기술 쓴 건데...”

한사코 돈을 받지 않겠다셨습니다.

게다 그게 다가 아니셨지요.

저 위 시렁에서 다른 보따리 하나를 꺼내시는데,

거기 새로 산 실내슬리퍼가 가득 있었습니다.

“몇 켤레 버리면서 나도 좀 좋은 일 하고 싶어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사람 때문에 산다던가요.

고맙습니다.

열심히 살아내야지 싶지요.

 

광평농장에 들립니다,

콩이며 젓갈이며 맡겨둔 것들 있었기.

안주인 현옥샘이 며칠 비운 집,

거실이며 욕실이며 부엌이며 후다닥 청소 좀 하고 나옵니다.

물꼬에 와서 그렇게 잠깐 돕는 손발이 큰 보탬이듯

우리 역시 다른 곳에 가면 그리 쓰이려 하지요.

다음은 길 건너 점순샘네 들립니다.

“우리 배추 놔두고 이 배추로 김장 다하고 싶다!”

실한 배추를 80여 포기 싣고, 알타리무와 파도 싣습니다.

아저씨가 차곡차곡 단도리를 잘해서 실어주셨지요.

사는 일에 힘이 나는 순간들입니다,

내 열심히 살아가리라, 마음 다잡는.

 

밤, 집안 어르신으로부터 연락입니다.

김장이며 고추장이며 메주 쑤는 일이며 와서 돕기로 하셨는데,

집 식구 하나 그만 다리 수술을 하게 된 소식입니다.

아...

못 오시면, 올해는 기락샘도 일본출장중이라

소사아저씨와 아이만 데리고 일하게 생겼는데,

이리 저리 궁리해보지만 아무래도 오시긴 무리입니다.

집집이 김장을 하는데 여기 김장 일에까지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려 하고,

이곳에 사람들이 오면 예 사는 일을 돕는 일도 벅찬데

웬만하면 김장만큼은 소리 없이 해서 밥상에 올려주고 싶지요.

음... 도저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먹기 나름!

아픈 사람을 홀로 두고 오게야 못하지요.

일은 또 어떻게든 됩니다.

정말 어르신 없이 하려는가. 해보지요!

여기서 사람들 불러 하겠으니 아니 오셔도 되겠다 늦은 밤 전화 넣습니다.

“아들도 있고!”

류옥하다 선수 곁에서 빽 한소리.

“봐, ‘아들도 있고’, 하는 게 문제야.”

그러게요, 저 아이에게 생의 무게를 너무 많이 지운다 싶습니다.

 

내 사는 일이 너무 절박해서 다른 이가 보이지 않을 때,

우울합니다.

겨울은 자주 그렇습니다.

돌아보니 맘이 이리저리 끄달리네요.

멈춤!

반신욕 뒤 선정호흡으로 수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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