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3.불날. 맑음

조회 수 1176 추천 수 0 2011.12.24 02:40:22

 

해가 짧아 아침이 조금만 더뎌도 점심 금세이고,

곧 어둑합니다.

산골은 더하지요.

 

흙집의 부실공사가 애를 먹이고 또 먹입니다.

수도는 두 차례의 겨울 내리 터지고

벽을 헐고 공사를 했더랬지요.

보일러실 안쪽으로 헌 채 있는 벽을

여름 가고 가을 가는 동안 그거 할 짬이 없습디다.

먹고 죽을래도 먹을 게 없다던 가난한 노인네의 신음처럼

죽을래도 죽을 시간이 없다던 근근한 삶의 늙은이처럼

순간순간 우리를 비장하게 만들던 산골 삶이더군요, 겨울 아니어도.

다시 계자 앞,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일,

소사아저씨가 어제 아침부터 부산하더니

아이와 함께 마무리 지었습니다.

오늘은 그 뒷정리.

그리고 지난 닷새 김장에서부터 장류일이며 부엌곳간을 채우느라 벌인

너저분함들을 걷어냅니다.

일이란 게 특히 다음 일을 위해서도 끝내놓고 치우는 게 더 중요하다시며

‘무식한 울어머니’도 씻고 엎고 다 하셨다지만

그래도 사는 사람들한테는 남아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지요.

사람들 다 내보고 소사아저씨, 사부작사부작 정리하셨습니다,

신발을 아예 신고 들어섰던 주방 쪽이며 너절한 부엌이며.

 

너무나 반가운 이름자를 들었습니다.

기억을 하느냐니요.

어찌 그를 잊을 수 있었으려나요, 얼마나 고운 후배였는데.

무엇보다 물꼬의 품앗이일꾼을 기억하는 건 도리이다마다요.

여식이 초등 1학년이라 하였습니다.

물꼬의 오랜 시간은,

주로 대학생들이었던 품앗이일꾼들이 어느새 가정을 일구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이곳에 오고 있지요.

재작년과 작년엔 중국에서도 그렇게 아이들이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이곳이 교육 공간이기에 그리 쉬 다시 기억될 수 있었을 겝니다.

고맙고, 감사한 일들이지요.

‘선배는 정말 오래전부터 말씀하신 대로 살고 계시네요. 의미 있게, 멋지게 사시는 것 같아 참 부럽습니다. 존경스럽기도 하구요...

전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멍 하니 시간만 흘러 보낸 것 같습니다.

그냥 정신없이 하루하루 살아내는 때가 참 많아졌습니다.

사회생활 초기엔 속도는 좀 느린 것 같지만 방향은 잘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방향도 틀린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신없이 시간만 자꾸 흘러가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까요.’

말이야 이리 하고 있지만 옹골지게 살아온 소식들을 들어왔더랍니다.

아, 뜨거웠던 젊은 날(이제 이리 말하는 세월이 된)이 용암처럼 몸에 흘렀더이다.

 

새끼일꾼 하나가 계자준비위원회를 꾸리자 연락 왔습니다.

기특합니다.

계자준비위원회!

서울 살 때야 계자를 다른 지방으로 갔으니 늘 그리 했지만

영동 내려와서는 사는 곳에서 계자를 하니

그저 사는 식구들이 준비하는 게 전부였지요,

‘정말 그거 한번 꾸려보자.

두셋만 되어도 신명도 나고 준비에 큰 도움이 될 듯.’

힘이 클 테지요.

 

여기는 남도.

바닷가 도시, 어시장을 나갔습니다.

병원에 입원중인 어르신이 있고,

또 다른 도시엔 아비 없는 세월 아버지셨던

눈이 멀어가는 어르신이 계시지요.

무엇 하나 아쉬운 게 없는 어르신들이라

늘 인사갈 때 들고 갈 게 걱정이더니

이거 잘 드시더라 싶어 챙겼습니다,

자주 못 와도 내려온 걸음에 사람 노릇하자고.

 

보기 좋은 나이 드신 분들을 만납니다.

귀걸이 하신 멋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젊을 적 선남선녀 소리 들으셨을 겝니다.

건어물을 사러 들어간 집이었더라지요.

“우리 아들 전문대 나왔어. 나는 전문대 나왔다 캐.”

요새 웬만하면 4년제 대학들 다 나왔지만

우리 아들 그리 못해도 충분히 잘났다 자랑하십니다.

제가 다 고맙더이다.

 

한 도시의 일가댁을 들렀다 한동안 신시가지에 계시게 된 어머니 댁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거 저기 걸었으면 싶어서...”

커튼까지 마련하긴 그렇고 바람 많아 천을 드리울까 하신다는데,

재봉틀이라도 있으면 만들어드리지 싶지만

‘무식한 울어머니’ 그런 거 안 하신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걸기는 뭣해 손바느질로 뚝닥뚝닥,

그럭저럭 그럴 듯한 커튼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바깥의 수도꼭지에 단 호스가 자꾸 빠져 여러 차례 끼우는 걸 보고

지나다 철물점 보이기 죄임쇠를 하나 사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끼웠습니다.

잠깐 움직이면 되는 이런 일이 무슨 일이라도 되는 양

어머니 여러 차례 좋아라 말씀하셨지요.

바깥에 드러나 있는 수도가 얼까 늘 걱정이시라기에

아이랑 보온재 사다가 단도리를 해드리기도 했습니다.

물꼬에서 살아가는 세월이 이런 일이 일도 아니게 했지요.

고마운 삶입니다.

이 정도 일에 이런 말 한다고 넘들이 들으면 우스울지 모르겠으나

정녕 독립할 힘을 원해왔던 삶은

일상을 더욱 견고하게 훈련할 수 있는 물꼬의 날들이었습니다.

 

참, 이번 주 쇠날 가기로 한 인천 특강을 2월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입안도 여기저기 헐고 고단한 일정이다 싶더니

다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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