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4.쇠날. 맑음

조회 수 1204 추천 수 0 2012.05.12 02:53:52

 

 

오전은 원고 하나랑 씨름하고,

소사아저씨는 시금치를 또 캐냈습니다.

 

읍내 장날입니다.

소사아저씨랑 다녀옵니다.

고추모종이 품귀라고 난리였지요.

작년에 고추 금이 좋았고,

너도나도 고추를 심는 올해입니다.

그래도 장이라고 모종이 나왔데요.

된장집 앞집 이모할머니네 것도 사고,

오이고추, 수세미 모종에 고구마순도 샀습니다.

 

꼬박 밤을 새며 자판을 두들기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깨우는 문자,

‘16년하고5개월동안동고동락했던삼순이가며칠전에곁을영원히떠나갔다.

좋은곳으로가기를함께기원해주라...’

제 나이 스물에 봤던 선배가 저보다 열 살쯤 더 먹었댔으니까, 지금은...

아버지를 두어 해전 먼저 보내고 개 삼순이랑 둘만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리듬으로 보자면 그 시간대는 숨도 쉬지 않을 형인데,

그 마음이 얼마나 쓸쓸하였을지요.

이 시간도 누군가는 가고 또 누군가는 오겠지만

그 ‘자연’스러움을 알고도 우리 얼마나 빈자리가 깊던지요.

아침 내내 대배를 하며 수행방에 앉았다가 나왔습니다

인간의 안타까움은 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는지.

‘다만 지극하게’ 살다가야겠다, 그리 되내어보는 아침이었습니다.

 

지역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시로 읽는 황진이-그 사람이 네게로 오네>(이생진/우리글/2003)를 서서 다시 펼쳤습니다.

머리말에서 시인은 이리 쓰고 있었지요.

‘고독이 얼마나 많은 시를 불러오는지, 외딴 섬을 혼자 걸어본 사람이면 알거다

나는 섬에 발붙이며 고독을 알았고 고독을 알면서 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시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에는 시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있다

고독속에 한 여인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시 쓰는 사람만이 아니다

나는 그런 여인과 속삭이듯 '그 사람이 네게로 오네'를 썼다

그러나 황진이를 소문 그대로의 삼절로 내세우지 않았다

나의 기억속에는 황진이의 재색도 없고 거문고 소리도 없다

다만 그녀가 남겨놓은 몇 편의 시가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게 했다

이 시를 다 쓰고나서야 그녀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서화담의 올곧은 가난과 시대의 험난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왠지 진이가 슬퍼 보였다’

 

접어놓았던 구절들을 펼치며(내 책 아니니 밑줄은 못 긋고) 읽었지요,

반납하려면 온전해얄 것이니.

 

살아서는 사람이 방황하더니

죽어서는 시가 방황하는 구나(동짓달 기나긴 밤-황진이·4)

(* 죽어서도 였는지 죽어서는 이었는지...)

 

갓끈을 적시는 연산군의 눈물

사람은 눈물을 흘릴 때 시인이 된다(연산군의 눈물-황진이·61)

 

시와 학문은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주색잡기-황진이·68)

 

거문고 소리에 물이 젖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구나(폭포와 거문고-황진이·79)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내가 백석이 되어-백석과 자야·2)

 

도서관 서가에서 선걸음에

르파주의 그래픽 노블 <게릴라들 : 총을 든 사제>도 보았습니다.

코믹스가 가벼운 만화라면,

그래픽노블이라면 깊이 있고 철학적주제를 다루는 만화 정도로 볼 수 있겠지요.

미국 만화의 거장 윌 아이즈너는

코믹스가 멜로디라면 그래픽노블은 심포니라던가요.

니카라과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의 혁명기,

기득권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기 위한 길을 걷던,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선 ‘소년’ 가브리엘은

(불어판 원제인 무차초(MUCHACHO); ‘소년’)

게릴라들과 함께 니카라과의 정글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정치적, 신학적, 성적 성장기를 건넙니다.

또박또박 되새기며 읽게 되는 구절들이 있지요.

‘어느 신앙심 깊은 남자가 어린 아이에게

“하느님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면 1페소를 줄게”합니다.

아이 왈, “하느님이 없는 곳을 말해주면 제가 10페소를 드릴게요.” ’

 

‘예수의 생애는 우리에게 굽신거리지 말고 살아라’ 한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을 공부했던 젊은 한 때가 있었습니다.

결국 신앙인일 수 없었던 한계가 신학공부의 한계가 되기도 했던 그때.

그 시절에 꿈꾸던 것들을 되내이게도 됩디다.

 

늦은 밤, 물꼬의 논두렁이기도 한 선배의 전화,

교수이기도 한 그인지라 대구의 한 대학과 얘기가 오가는 초빙교수 건에 대해

의논을 하기도 합니다.

때 되면 꼭 연락하고,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는 당신이지요.

“형은 어떻게 그렇게 딱 정리를 잘 해줘?”

“내가 너를 잘 알잖아.”

그 뒤의 형의 말, ‘통’하잖아, 라 했습니다.

통함...

통하거나 불통하거나, 사람 사이 그런 게 있지요.

고마운 일입니다, 통함.

 

야삼경, 아이는 마감일에 맞춰

달마다 한차례 송고하는 출판서평전문잡지에 실을 글을 남해의 한 암자에서 쓰고

어미는 어미대로 영동 산골에서 마감할 원고를 쓰며 서로 격려합니다.

연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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