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일기 시작하던 바람이 밤이 되자 무섭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과 함께 비도 찾아오더니 점점 굵어지네요.

물꼬는 종일 고요했습니다.

밥 때를 빼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듯했지요.

 

무리하게 몸을 몰아대던 며칠의 일정은

그예 온몸에 두드러기를 불렀습니다.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어떤 것이 면역력이 떨어지고 나면

그렇게 들고 일어나는 거지요.

어디 우리 몸만 그럴까요.

“우리 중에서 가장 시골 사는 사람 맞아?”

어제 선배들의 핀잔.

풀독으로 그랬던 건지 온 몸에 두드러기,

모기는 혼자 다 물리고,

회도 고기도 안 먹어 상 차린 이들 신경 쓰이게 하고, ...

 

아이들의 학부모이고 물꼬의 논두렁이고

그리고 내 영혼의 벗으로부터 온 메일 한 통.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들이

시간차를 두고 띄엄띄엄 일어나길 바라는 바램을 담아.

'아래 남동생이 죽으면서 카드빚을 비롯한 각종 채무와 은행, 카드사, 캐피탈 등

수많은 종류의 빌린 돈과 그 연관기관을 경험하여서

어쩌든지 빚 없이 살아보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런 속에 전세금 때문에 적금을 붓느라 몹시 동동대다가

그만 다른 일이 터져 그 돈을 다 써버리게 되니까 어찌나 신경질이 나던지

친구한테 내 인생 최대의 안티가 친정이라며 투덜대기도 하고

술도 사서 마시고 대형마트에 가서 뭉텅이로 장도 보고 했'다지요.

여기까지는 우리 곁에서 한 번씩 숨을 몰아대게 하는

일상 아닌척하지만 결국 일상,

그런데 그것에 우리는 각자 어떤 반응들을 할까요.

그에게 ‘더위와 두통과 짜증 속에서도 다시 온 작은 깨달음은’

자신에게 책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오쿠다히데오와 온다리쿠를 읽고

토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지요.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그 책들이 준 위안과 위로 덕에,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무기력이 집어삼켰을지도,

그는 그렇게 메일을 쓸 수 있지 않았을지.

‘예전부터 저는 의식주 중에 입성이나 주거보다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즘 마음이 가난해서 그런지

진짜로 어려운 할머니가 길을 가다 그보다 더 어려운 동네 청년을 만났는데

있는 돈을 다 털다시피 해서 떡 한 봉지를 사 주는 장면이나

가진 것도 배운것도 없이 물지게를 져 나르는 청년이 물 배달을 오면

더운물에 밥을 말아 마시고 가게 하는 찬모 아줌마가 나오는 장면들이

선명하게 오더라구요.’

물꼬가 잠시 고민했던 달골 이전 계획이 올 겨울 이전 이루어지는가를 물었고,

그건 좀 더 있어얄 듯,

혹 지독할지 모를 가을학기일 듯하다던 말을 기억하고

2학기 달력을 쭈욱 보니 얼마 안 남았더라며 위로해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날을 털어낸 힘이,

갈 곳에 가고 있을 곳에 자리는 앉아 있으나,

그에게 책이었다면 제게는 무엇이려나요.

한동안 좀 더 그리 자신을 팽개쳐보자 합니다.

사실 그것도 의지라기보다는 무기력.

마음이 황폐해지기 전 털어내야지요.

잭 콘필드의 책 어느 구절에서였던가요,

더 이상 영적 목표를 좇아 발버둥치지 않는다,

그러게요,

우리 삶에 어제 하던 일을 해가는 것밖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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