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5.나무날. 맑음

조회 수 993 추천 수 0 2012.11.08 03:23:07

 

 

위탁교육 나흘째.

새벽 5시 잠이 깬 아이가 불렀습니다.

시간을 알려주며 비염약 안 먹고 잤다 하니 먹고 더 잔다데요.

아침 9시가 넘도록 더 잔 아이.

느지막히 일어난 아이는 빵을 구워도 먹고 그냥도 먹고

사과를 내내 달고 다니고.

형아가 깎는 법을 가르쳐준 뒤로

저 혼자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

 

벽체와 거실 바닥의 누수를 잡느라고

햇발동을 뒤집고 내부 보수를 마무리한 게 지난 흙날.

그리고 해날 청소하고 들어와 나흘이 지났으나

아침마다 청소를 해내도 시멘트 먼지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오고.

 

품앗이 샘 하나 빈들모임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

“넉넉한 가정과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물꼬 오는 걸음도 더 가벼웠을 거라며

몇 년째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의 쓸쓸한 문자.

“샘아, 괜찮다, 다 괜찮다, 물꼬가 어디 가누. 언제든 오면 되지.

저마다 사는 일이 다 그리 힘에 겹더라.

무식한 울 어머니는 늘,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

잘 될 거라 믿어보세나.”

 

우리 유설샘의 문자, 공사비를 보탰다는.

“좀더 힘을 보태드려야는데 공부한다고 벌려논 일 많아 형편껏 보냈어요...”

구차한 얘기들을 해서 두루 마음을 쓰이게 하네 싶은,

약간 울적해지는 마음.

“목소리가 떨릴까 봐 전화는 못 넣었소...”

그렇게 고맙다는 답문자.

그 부부의 주례를 섰더랬습니다.

그리고 아들 딸이 태어났지요.

고마운 인연들입니다.

 

한 밥바라지 엄마의 문자도.

댁내 아이 하나,

대안학교를 거쳐 일반학교로 갔다가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신없다가 아! 물꼬가 있었지 이렇게 평안을 찾을 때가 있어요.”

그래요, 그리 할라고 이 산골서 어찌 어찌 해본답니다.

 

“자, 일하러 가자.”

부엌 냉장고 정리를 하는 동안

바깥에서 형아와 어른들을 따라 뒤란 정리를 돕는 아이.

부엌과 큰해우소 사이 공터에는 ‘되살림터’(쓰레기 분리수거 공간)도 가까이 있어

늘 잠시 잊으면 허드렛 것들이 쌓이고 마는 곳이랍니다.

아이는 망치로 나무를 해체하는 작업을 돕고 못도 뽑았지요.

그 나무로 본관 화목보일러 불도 지펴본 오늘,

복도가 후끈했지요.

아이들이 다녀가는 겨울밤이 따숩겠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점심으로 죽.

“어쩐지 맛있더라.”

제 손을 보탰다고 의기양양해진 아이.

 

다음은 고추 고르기.

성한 것과 거름으로 보낼 것들 가르기.

좀 놀다가 한 시간의 오늘 상담; “가만있어야 할 때!”

자기 하던 걸 멈춰야 할 때가 있지요.

그런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짧은 몇 걸음의 산책,

아이에게 가을 물이 금세 든.

 

“옥샘, 나와 봐요. 달떴어요.”

아직 어둡기 전 초저녁달이 뜬 하늘을 보며

마당에서 아이가 불렀습니다.

달빛이 아이를 감싸주고 있데요.

아이에게 치유가 일어났다면

그건 순전히 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일 겝니다.

어두워오는 계곡을 나가 면소재지 잠깐 다녀오며

과자 하나로 아주 신이 나기도 한 아이.

 

저녁,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상을 차립니다.

권할 음식은 아니지만 어쩌다 우리도 먹고 싶어 하는 것.

아이 핑계로 같이 즐거운 밥상.

그런데, 아이가 사람들을 위해 물을 떠왔습니다!

형아는 오늘 밥상머리 예절에 대해 들려주고 있었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설거지와 저녁 수행.

 

아이 빨래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가니

아이가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자기 전 먹는 비염약도 거르고.

‘저도 곤할 게다, 이 너른 곳에서 여러 날을 보내느라고...’

양말 빠는 것도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이리 날이 성큼성큼 가버렸습니다.

 

아, 달골 공사 측에서 또 몇 백의 돈을 요구해왔습니다.

재산세를 2분기 못 챙겼더니 은행 구좌가 정지되었다며 레미콘 값을 치러달라는 것.

꺼내기 쉽지 않은 얘기를 어렵게 한 그 마음을 헤아린다고

보내자 하는데 인터넷 뱅킹 에러.

헌데, 다시 생각하니 줄 일이 아니라는 결론, 야박하나 우리 사정도 코가 석자여.

계약대로 남은 50%는 공사 종료와 함께 지불할 것.

“죄송합니다. 아무렴 산골 사는 아줌마보다 큰 사업 하시는 분이

 돈을 돌리는 일이 더 쉽지 않겠는지요.”

 

내일은 빈들모임,

쉬어가겠다던 가을학기였다가 사람들 보자 하니

설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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