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12.달날. 맑음

조회 수 771 추천 수 0 2013.09.01 01:40:53

 

 

이른 아침, 손님 맞을 채비를 합니다.

걸레질도 하고 욕실도 치우고.

그런데, 달골 마당에서 뽑았던 풀들을 걷다가

죽어있는 커다란 벌레 한 마리 봅니다.

죽은 그가 무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놀랐을까요,

죽었다, 그거 말고 아무것도 없는데.

놀라고, 죽은 이가 풍기는 내음에 얼굴 돌리고,

다른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다 제 ‘안’에서 일어난 일.

벌레 한 마리 죽어있었다, 그것만이 ‘사실’ 혹은 ‘실체’.

 

종일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전화기를 그만 놓치고 나왔는데,

오는 길에 급한 전갈을 받고 되돌아갔다 오느라

저녁에야 당도한 이들.

고교 은사님이 가족 분들과 닿았습니다.

최근 몇 해 물꼬 가까운 곳으로 발령을 받아

교사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계시는 당신입니다.

좀 한가한 사람이 하는 게 맞다시며

달마다 안부 전화를 넣어오셨더랬는데,

방문은 처음이시지요.

 

저녁을 먹고 달골 올라

30년 전의 이야기를 하느라고 밤 가는 줄 몰랐지요.

그 오래 전의 인연이 제 삶터로 들어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진한 감회.

이제는 잊은 이름자들을 하나하나 들먹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이 불려나오고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딸려 나오고...

“넘들 학교 마치고 나가는데 자기는 올라오고...”

아, 제가 그랬더랍니다.

나는 잊은 시간을 때로 다른 이들이 되살려주고는 하지요.

까마득하게 잊고 지낸 시간의 나를

정작 타인이 살려내 주고 있었더이다.

하기야 어느 제자인들 선생들에게 인상 깊지 않겠는지요.

한편, 기억이란 얼마나 서로가 다르기도 하던지.

내겐 어눌했던 어린 날이

당신에겐 교사로서 보낸 시간에 가장 영민했던 한 아이이기도 했다니.

나는 그랬는지도 몰랐던 장면을

너무나 생생하게 풍경으로 불러내주신.

아, 나도 우리 아이들의 순간을 그리 펼쳐 주리라, 다짐 일던.

 

계자 후속 일들은 사나흘 뒤에야 시작하겠습니다.

주 5일 수업으로 방학이 짧아지니

곧 고교가 개학이라시지요.

물꼬랑 일정을 맞추느라 오래오래 기다렸던 당신이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허락된 이런 시간이라니.

고맙고 감사한 시간.

 

하늘 흐렸습니다.

내일이 칠석.

다행히 늦은 밤 구름 걷히고

하늘은 뿌옇게나마 미리내를 보여주고 있었지요.

손님들에게 좋은 선물이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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