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14.쇠날. 늦은 보름달

조회 수 660 추천 수 0 2014.03.11 13:09:35

 

이웃마을 작업실에서 만든 긴의자를 실어옵니다.

목수일을 보는 그 댁엔 물꼬에 없는 스킬이란 게 있어

나무를 사선으로 얼마든지 길게 재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같이 서로 잡아주며 각자의 의자를 만들었더랬지요.

언제 트럭이 오는 걸음에 실어다주겠다 했으나

얼른 실어와 살구나무 아래 두고 싶은 조바심에

무리해서 트렁크에 실어왔는데,

닫히지 않는 문으로 차를 자주 세우고 아이가 나가 단도리를 해야 했네요.

 

오늘 제도학교로 가는 아이의 교복을 맞추었습니다.

산마을에서 홀로 공부하다 고교를 제도 안으로 가게 된 아이.

소사아저씨의 설 선물이었지요.

물꼬의 어른들은 물꼬로부터 겨우 5만원의 용돈을 받습니다.

물론 보험이 있기도 하지만,

생활공간을 쓰고, 먹고 자고 교통비와 몇 가지가 제공되기도 하지만,

돈으로 주어지는 건 그게 전부.

여전히 월급이 없는 학교입니다.

그 돈을 6개월 모아야 30만원이 되지요.

그걸 아이 입학선물도 내놓으셨더랬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주는 이야기.

꼭 10년을 함께(그 세월도 반년이 지난) 산 동료입니다.

그런데, 그게 동복이랍니다. 춘추복도 있고 하복도 있다네요.

부모들 학교 보내는 것도 참말 일이겠습디다요.

 

소치올림픽으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애썼습니다.

메달을 따든 그렇지 않든 충분히 최고인 그들.

메달을 걸면 같이 즐겁고, 고맙습니다.

영상매체가 내내 전하는 대로

사람들도 보고 또 보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끼치는 해악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체제가 강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찾아오지 않는다던,

자본이 강요하는 노역의 시간이 끝나고도

곧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다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재벌의 광고로 도배된 TV를 보고 재벌이 파는 것들을 사고 쓰고

우리에게 노역을 주고 돈 쓰는 기쁨을 안겨주는 우리의 주인들.

재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없는.

박노자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대중강연에서 누군가 질문했다지요.

“국가 대항전 형태의 축구시합에 빠져드는 것이 왜 위험한지 잘 알겠는데,

그래도 TV에서 운동경기라도 보면서 응원하지 않으면

여가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TV에서 국가와 재벌이 고용한 선수라는 이름의 현대판 검투사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고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눈을 감고 내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게 된 인연에 대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고,

한반도 곳곳에 보이는 산에 올라

새들의 노래를 듣고 나무와 꽃들과 침묵의 대화를 가져볼 수도 있고,

이 땅에서 과거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문인들의 글을 천천히 음미해볼 수도 있고...”

인간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평온과 고요함의 시간을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는데

남과 같이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조용하게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삼성공화국의 배부른 노예대다수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실존)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는.

그러며 그가 말했지요.

이런 기성세대가 있기에

수만 명의 10대들이 온라인 게임의 중독자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어릴 때부터 이미 폐인이 돼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TV없이는 하루를 보낼 수없는 우리의 노예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고.

물꼬에 TV가 없는 까닭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물꼬는 정녕 자유로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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